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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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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기고했던 글이 남자와 여자의 '연극'에 집중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서로의 '최초의 기억'이 연극 간의 개입을 가능하게끔 추동하는 구조를 살펴보자.

 

우선 남자의 연극이 여자의 연극에 선행하므로 그것의 배경을 구성하는 최초의 기억 역시 남자의 것부터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내내 학교뿐 아니라, 집 밖으로는 전혀 나가지 않고 살아왔어. 나는 아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는 외톨이 병자야, 내 질병, 내 가난, 내 고독, 그리고 너와 관련한 이 기억이 나의 전부야, 내 삶의 전부야, (...) 네가 춤추면서 바다로 가는 것을 보았어,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거니, 내가 네 뒤를 따라갔는데? 나는 가장 먼저 너에게 달려갔고,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따라왔고, 그래서 우리는 다 함께 바다로 갔어! 그게 내가 본 최초의 바다였어! 설명할 수 없지만, 우루, 너는 내게 최초를 보여준 거야!

 

 

소설은 105쪽에서 남자가 가진 최초의 기억을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독자는 '여자가 춤을 추면서 바다로 간 것'이 남자에게 최초의 기억으로 존재한다는 대목에서 이것이 여자가 기획한 연극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자의 연극이 여자의 연극보다 먼저 발생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보여준 바다가 남자의 기억을 지배하고, 나아가 남자의 연극과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의 연극에 정확히 언제, 어떻게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소설 자체가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틀어 놓은 작가의 이미지이며 이미지의 총체이기에.

 

여자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에 대해 토로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그가 분명 여자가 격상 혹은 격하시킨 남자 학생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자는 이전의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억을 잊었던 것이며, 그 기억이 생생해지며 과거를 되찾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남자의 기억의 방향성은 역행이기 때문이다. 135쪽에서 남자는 '사랑은 상대방의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그것을 함께 체험하고자 하는 욕망이고 아름다움이란 후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자에게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특정할 수 없는 미지의 목소리란 남자의 목소리이며 이는 각자의 연극이 서로에게 중첩되거나 침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자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어떠한가. 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대단히 명시적으로 반복된다. 그것은 일곱 살의 나이에 시작한 초경의 충격이다. 즉, 남자가 기획한 연극의 시작이다. 여자는 이전의 기억이 없으며 오히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그 시발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135쪽에서는 남자의 기억이 역행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함께 여자의 기억의 방향성이 순행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여자는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으며 나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안다'고 말한다.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안다는 것은 연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바로 그 연극이 어떠한 것인가를 안다는 것이다. 미성년인 여자는 성인 남자와의 사랑이 시작된 경위를, 과정을, 고통을 세세하게 기억할 수 없으나 오히려 성인 남성보다도 더욱 민감하게, 첨예하게, 처절하게 사랑을 안다.

 

아울러 여자의 기억이 순행의 성질이라는 것은 책 속에서 여러 차례 설명된다. 140쪽에서 여자는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가고 있을 때면, 종종 언뜻언뜻 시야를 스치며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요."라는 한 영화감독의 말에 주목하며, 소설의 도입부터 결말까지 버스와 기차, 비행기 등을 모두 탄 사람은 여자뿐이다. 또한 142쪽에 등장하는 '우루는 지난여름 두 달 내내 홀로 머물렀던 MJ의 시골집을 두 번 다시 그리워하며 떠올리지 않는다'는 문장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남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고전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기억이, 연극이, 사랑이 과거로 흘러들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되찾고 증폭시킨다. 이는 여자의 기억이, 연극이, 사랑이 어린 시절의 기억 없이도 가능했다는 점과 상반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자의 기억은 산발적인 역행을 겪는다. 왜? 여자에게는 남자의 연극 외에도 '최초의 여인'이 존재하므로.


 

고리 무늬가 진한 뱀을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것은 도래할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 우루는 본다. 그녀의 눈은 어디에서 왔을까? 여리고 숨겨진, 노란 달을 감춘 개과 동물의 눈동자는. 우루는 끊임없이 보는데, 그녀가 보는 것은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최초의 여인이다. 최초의 여인은 매번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 우루의 앞을 지나쳐 간다. (...) 그것은 차마 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이미지를 강하게 연상시켰다. 한참 뒤 마침내 우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길다란 회색 머리카락이 달린 해골이었다.

 

 

뱀과 해골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을 가져다 놓더라도, 여자의 어머니이자 최초의 여인이 소설 속에서 제시되는 방식은 오직 이미지이다. 이미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체적으로 존재하여 여자로 하여금 삶과 연극의 경계를 분명히 인식하게끔 하는 것은 최초의 여인이 맡은 역할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는 최초의 여인을 통해 연극과 연극 간의 개입 및 충돌을 흐릿하면서도 또렷하게 인식한다.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 "어머니가 죽었다 내 기원의 징후가 사라졌다"라는 구절이 손님(작가)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는 지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내 최초의 기억은 일곱 살이란 이른 나이에 시작한 초경의 충격이었다. 그날 나는 혼돈의 어린아이인 채로 어머니 없이 홀로 태어났다. 핏빛 번개 속에서 나는 집으로 갔고, 일생 동안 어머니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 어머니는 내 기억의 저편 강가에 누워 있다. 일생 동안 나는 어머니의 뜨거운 살로부터, 어머니의 역겨움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살았다. 내 기억이 시작되기도 전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목 졸라 죽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고, 출소 이후에는 스스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에게는 최초의 기억과 최초의 여인이 마치 어떤 색채 화면이 명멸하듯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일생 동안 어머니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초의 기억 이후에 속한다. 일곱 살에 시작한 초경이란 남자 선생과의 사랑이며, 남자가 기획한 연극 속에서 여자는 혼돈의 어린아이인 채로, 배우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목 졸라 죽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다는 것은 굉장히 모호한 지점이다. 자신의 딸이 성인이자 교사인 남성과 사랑을 나누고 그것이 학교에 추문을 일으켰기에 아이를 목 졸라 죽인 것이라면, 여자는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죽어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남자는 죽은 여자 학생을 위해서 그녀의 부활을 하나의 배경이자 조건으로 삼는 연극을 기획한 것인가?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틀에 갇혀 '최초의 여인'이라는 테마를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자는 분명 어머니 없이 홀로 태어난 존재다. 즉, 여자는 남자의 연극 속에서 그 자신이 곧 최초의 여인이며 동시에 연극 이전의 최초의 여인인 어머니를 본다. 여자에게는 어머니가 최초의 여인이지만, 남자에게는 여자가 최초의 여인이다. 최초의 기억 이전에 존재하는 기억 속에서, 남자의 연극과 어머니라는 두 가지의 조건이 개입하는 상황 속에서, 여자 자신이 기획한 연극 속에서 도대체 여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사진을 본다. 사진은 누군가의 바라봄이지만, 내가 보는 것은 그 눈이 사라진 이후, 머나먼 익명의 잔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종 사진을 본다는 것은, 눈 없이, 멀리서 보는 행위이다. 나는 눈 없이, 오직 멀리서 본다. 그녀는 여기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내 손가락 끝 혹은 왼쪽 귀? 오래전 일이고, 그들은 젊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의 어떤 순간에 내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저 멀리 고향 하늘 번개가 번쩍이며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래전에 죽었다......' 어머니가 죽은 집에서, 나는 양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자세로 시체처럼 앉아 있다. (...) 내 안에서 최초의 여인을 느끼는 순간, 내 안에서 최초의 여인이 고요히 타기 시작하는 발화의 순간, 불현듯 내가 누군가의 유령이라는 강한 느낌과 함께, 그것이야말로 내 존재의 유일한 근거이며 이유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여자가 어머니에 의해 죽임을 당해 유령이 된 이후 남자의 연극이 시작되었다고 해석하든, 여자의 연극 속에서 여자가 남자와의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고 해석하든, 그것은 크게 중요치 않을 것이다. 연극과 삶이 겹쳐져 있고, 연극과 연극이 겹쳐져 있는 것처럼 여자가 사진을 볼 때 그 사진은 이미 누군가의 바라봄이다. 120쪽에서 여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어머니의 집에 있었고 어머니의 사진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연극의 개입을 암시했던 장치와 다르지 않다. 문득 어머니의 사진이 손에 들려 있었고, 문득 최초의 여인을 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자는 그저 무언가를 봤다는 것이다.

 

도대체 여자는 무엇을 보고 있다는 것인가. 여자는 사진을 통해 남자의 역행과는 다른, 자신을 죽인 어머니의 시선으로 과거 혹은 미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은 저녁의 바닷가를 달려가는 개들을 찍은 사진이다. 이때 바닷가는 여자를, 개는 남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속에서 표류하는 개의 이미지, 개가 찍힌 사진, 그것을 찍는 존재에 대해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제 또 하나의 다른 존재를 어떻게든 헤아려 보아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소설의 초반부에만 등장하는 무녀가 어떻게 소설의 전체 혹은 부분을 관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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