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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피부로 느끼는 전쟁의 공포 - 연극 ‘벙커 트릴로지’ [공연]

천만 개의 삶, 천만 개의 진실, 천만 개의 슬픔

by 이진 에디터
2026.01.09 19:21

 

 

고통은 핏줄을 타고 대를 이어 유전된다. 어떤 아픔은 한 가족 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슬픔과 두려움이 뒤엉킨 트라우마는 가정, 마을, 도시, 국가, 국경을 넘는 시대와 인류의 아픔으로 전염된다. 동시대를 산 이들이 함께 견뎌낸 고통은 역사가 돼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진다. 과거의 비극적 사건을 다룰 땐 절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단 전제가 반드시 따라붙는다. 하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쳇바퀴를 돌며 같은 비극을 재현해 왔다. 그 비극의 이름은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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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7일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개막해 2026년 3월 2일에 막을 내리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제1차 세계대전 참호가 배경이다. 작품은 아더왕 전설 기반 ‘모르가나’, 그리스 신화 기반 ‘아가멤논’, 셰익스피어 4대 비극 기반 ‘맥베스’까지 세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2013년, 2014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매진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킨 <벙커 트릴로지>는 2016년, 2018년 한국에서도 매진 신화를 써 내려갔다.


한 작품이 세 개의 에피소드로 나뉘며, 100석 규모의 비좁은 공간에서 공연된단 점에서 작품은 같은 프로덕션 작품 <카포네 트릴로지>와 맥을 같이 한다. <카포네 트릴로지>와 마찬가지로 제스로컴튼 프로덕션 원작인 <벙커 트릴로지>는 지이선 작가가 각색하고 김태형이 연출했다. <카포네 트릴로지> 빨간 풍선처럼, <벙커 트릴로지> 또한 세 에피소드 모두 베개·촛불 등 같은 소품을 활용하고 동일한 대사를 추가해 이야기들을 유기적으로 엮었다.


참호를 형상화한 무대 및 객석에 연신 들려오는 포탄 소리는 관객을 ‘솔져5’로 만든다. (극은 에피소드가 세 개이며 배우들도 일인 다역을 소화하기에, 예매 페이지엔 배역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 네 명의 배우는 ‘솔져’ 뒤에 숫자를 붙인 형태로 구분된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 1열에 앉으면 배우와 닿을 정도로 경계가 흐린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 또한 관객에게 전쟁의 공포와 참상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공간의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몰입감뿐 아니라 서사의 양과 밀도 또한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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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 에피소드 주인공은 독일군 에이스 저격수 남편 알베르트와 영국인 귀족 출신이자 사격수 아내 크리스틴이다. 극은 알베르트의 독일군 참호와 크리스틴이 남편을 기다리는 집이 번갈아 나오며 전개된다. 작품은 그리스 신화 속 미케네 왕이자 트로이 원정군 총지휘관인 아가멤논을 알베르트에 빗댔고,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를 크리스틴에 대입했다. 전쟁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된다.


오빠 셋을 둔 귀족 가문 막내딸 크리스틴은 강단 있는 성격이다. 참정권이 없는 영국 여성들의 처지에 분노하는 그에게, 여성 인권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삶을 산 알베르트가 반한 건 운명이자 악연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거짓말처럼’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알베르트는 남편, 아버지보다 독일군이길 택한다. 영국군과 대치하는 최전방 전선에서 저격수로 활약하는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며 미쳐간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함께 아가멤논을 살해한 아이기스토스는 요한이란 인물에 대입된다. 요한은 알베르트의 먼 친척으로 유대인이며, 한쪽 다리를 전다. 오랫동안 크리스틴을 짝사랑하던 요한은 출산을 앞둔 아내를 보살펴달란 알베르트의 부탁을 충실히 따른다. 알베르트의 친척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여자를 오래 바라본 남자였기에 크리스틴 곁에 남은 것이다.


허무하게 아이를 잃고 독일과 남편을 향한 증오심에 휩싸인 크리스틴을 일깨운 건 요한이었다. 크리스틴은 독일인 알베르트 아내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모성 강한 어머니이자 영국인이었다.


참호에 틀어박힌 알베르트가 자신이 누군지 잃어가는 사이, 아이를 전쟁의 제물로 빼앗긴 크리스틴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잃었던 자아와 정체성을 되찾는다. 크리스틴의 사랑은 분노와 복수로 변했고, 요한의 사랑은 함께 손에 피를 묻히는 헌신이었다. 전쟁으로 마모된 알베르트의 사랑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덫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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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참호와 집이 번갈아 나오다 한 공간으로 합쳐지며 극은 비극적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크리스틴과 알베르트는 한집에 살았고, 가정을 꾸린 부부였지만 마음과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부부의 시간과 공간이 한 곳으로 합쳐지는 연출에선 이 점이 더욱 적나라하게 부각된다.


살인이 임무이자 훈장인 저격수 알베르트는 전쟁의 고통에 잠식돼 가정을 외면한다. 크리스틴이 홀로 낳은 아이가 비극의 제물로 희생된 것도 모르는 그는 아내의 품에서 쉬기만을 바랄 뿐이다. 잠들지 못하던 맥베스처럼 괴로워하던 알베르트는 잠에 들고, 아더왕 전설 속 마녀가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크리스틴 또한 결혼 전 주도하던 삶을 되찾는다.


<벙커 트릴로지> 아가멤논은 이처럼 전쟁의 희생양은 군인들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군인이기 전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터로 떠나보낸 이들 또한 집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건 언제나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들이었다. 크리스틴의 아기는 아버지 알베르트의 얼굴조차 못 보고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벙커 트릴로지>는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달해도 변하지 않는 전쟁의 본질을 조명하며 화두를 던진다. 작품에선 전쟁을 일으키는 건 늙은이들인데, 억울하게 희생되는 건 젊은 사람들이란 맥락의 대사가 나온다. 이는 인류 역사에 최초로 기록된 전쟁부터, AI 군인이 참전하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전쟁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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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참호에서 첫 살인을 저지른 알베르트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크리스틴의 아기, 이름 모를 젊은 병사들도 희생양이었지만 알베르트 또한 수많은 죽음을 만들며 자신까지도 서서히 희생시키고 있었다. 전쟁 전 평화로웠던 삶을, 크리스틴과 함께 만들어야 했을 행복한 미래를, 영민하고 열정적이었던 젊음까지도.


전쟁은 선한 이에게 악행을 저지르게 만들고, 악한 자에게 선한 가면을 씌우기도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운명은 매 순간 뒤바뀌며,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의미가 사라진다. 개인의 고통은 가정, 국가, 시대의 비극이 된다. 오늘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선 여전히 무고한 이들의 피가 흐른다. 오래전부터 흐르고 또 흐르다 이젠 딱딱하게 굳어진 그 피는 인류 역사에 새겨진 낙인이 됐다. 죄악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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