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이 '강' 씨라는 이유로 학창 시절 내내 2번 뒤로 가본 적이 없었다.
새 학기 첫날이면 무조건 거쳐야 하는 자기소개 시간, 안 그래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1번이라는 이유로 늘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싫었던 기억이 있다. 다른 친구들은 앞 친구의 말을 참고하거나 충분히 고민하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나는 늘 이름과 학번, 좋아하는 것 정도만 말하고 자리에 앉아야 했다.
물론 앞 순서라도 잘하는 사람은 잘하겠지만, 말을 할 때 누구보다 천천히 생각하고 속으로 충분히 정리한 뒤에야 겨우 한마디를 꺼내는 나에게는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었다.
#2
학생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나를 수식하지 않게 되었을 땐, 텍스트로 자기소개서를 수도 없이 썼더랬다. 글은 말로 하는 자기소개와는 또 다르다. 말은 뱉는 순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글은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말을 더듬거나 뜸 들여도 재촉하는 사람이 없는 글은 나와 잘 맞는 소통 수단이었다.
하지만 글로써 나를 온전히 설명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오직 '합격'을 받기 위해 썼던 자기소개서는 늘 정해진 틀 안에서만 나를 보여주기를 요구했다. 지원동기는 무엇인지, 강점은 무엇인지, 어떤 경험이 있는지 등등. 이와 같은 질문들은 진짜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조금 더 그럴듯한 나로 포장하게 했다.
그들이 원하는, 혹은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문장으로 말이다.
#3
일을 시작하고 나면 그 일을 통해 '나다움'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시작했지만, 그것들을 매일 결과물로 증명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더 지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이다.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게 정녕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나한테 맞는 길을 잘 가고 있는 게 맞을까.
졸업 후 비전공자의 삶을 택했다. 전공 분야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지금 하는 일에 대한 확신도 없다. 비전공인 만큼, 다른 사람들은 학교 수업을 통해 다져놓은 기본기를 스스로 익혀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을 잊고 사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채워 넣는 것들이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마주하고, 그걸 하나씩 메워가는 과정이 오히려 나를 좀 더 유연하고 둥근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만의 취향과 정체성도 선명해지는 걸 느낀다.
#4
돌이켜보면, 자기소개가 늘 어려웠던 이유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를 설명하려 애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은 20대는 남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갖춰나가기 위한 연습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부족함을 하나씩 채워가고,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가고, 조금씩 나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것. 그 시간들이 또다시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 30대의 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