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 대신 망각을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2.1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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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 글을 쓰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열망

그라포마니아(graphomania): 글을 쓰고 싶은 강박적 충동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던 작가 세라 망구소는 25년 동안 강박적으로 일기를 써왔다.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녀는 그라포마니아였을까. 기록에 대한 기록이 담긴 그녀의 에세이 제목은 <망각 일기>.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 수년간 기록을 이어온 그녀의 에세이에는 역설적으로도 '기억' 일기가 아닌 '망각' 일기라는 제목이 붙는다.

 

 

 

기억할수록 오염되는 기억


 

작가가 자전적 기록을 이어온 행위는 그녀의 사라지는 기억을 붙들어 주었을까? 그녀의 기록에 대한 고찰은 흥미롭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억은 기억상실증 환자의 뇌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기억을 기억함으로써 오염시킬 수 없는 사람의 뇌 속에 말이다. 기억을 회상할수록, 그 기억에 관한 기억은 더 희미해진다. 기억 그리고 세상의 모든 키스는 어쩌면 두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34)

 

언제나 진실에 가까워지려 했다. 나에게 진실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란 과거를 되짚어보고 분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기억들은 과연 진짜일까? 내 기억이 얼마나 사실적인 것인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들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세라 망구소의 문장들처럼, 어쩌면 기억을 기억함으로써 오염된 잔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억을 거듭할수록 진실은 묻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은 "현재"의 감정이 만들어낸 왜곡된 환상일 뿐 더 이상 "과거"의 일은 아니다.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서 객관적 사실을 기억해 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그대로 기억할 수 없다 한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왜곡된 기억을 믿어야 하는 걸까?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으로 붙잡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인간의 오만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신은 인간에게 망각의 기능을 주었나보다. 기억과 진실 그리고 기록에 관한 답이 없는 질문을 멈추고, 이쯤에서 '망각'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망각을 위한 기록


 

["고등학생 시절에 쓴 일기장은 이미 갈가리 찢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못 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기억하고, 그 일이 전부였다는 확신을 품고 싶다."] (p.25)

 

["... 그런데 어떤 노작가가 생애 마지막으로 쓴 글에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기억을 사랑했는데, 나이가 들고 나서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면 그 향수에 관한 기억 속에서 길을 잃는다고 말했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밤새도록 그 기억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45)

 

작가 세라 망구소는 기록을 이어가던 중, 깨닫는다. 기록으로 모든 사실을 기억할 수 없으며, 기록은 기억하고 싶은 기억들을 선별해 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그리고 특정한 기억 속에 매몰되는 것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을.

 

현재를 잃지 않으려 기록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우리는 현재를 적당하게 포착하면서 적당히 망각하기 위해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재를 털어버리려 일기를 쓰고, 지금의 순간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는다. 어렴풋한 상이 기록을 통해 구체성을 띠게 될 때 비로소 과거를 잊을 용기가 생길 것만 같다. 기억보다는 망각을 위한 일기였기에 이 짧지만 묵직한 에세이의 이름 또한 <망각 일기>다. 

 

지나간 일을 분석하고 진실을 제대로 보고 싶을 때 내 주관적 기억이 크게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결코 객관적 진실이란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기억보다는 망각을 택하려 한다. 망각의 기능을 사랑하려 한다. 한낱 기억에 불과한 과거의 분석을 멈추고, 망각하자. 벗어나자. 자유로워지자. 

 

그리고 어쩌면 기억 대신 망각이 나를 진실로 데려가 주지는 않을지 기대해 본다.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 내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나는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나를 잊지 마." 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물론 나오코는 알았다. 내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中

  

 

[임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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