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망상의 발생과 정치적 전이
『죔레는 거기에』의 소설의 주인공 카다 요제프는 주변에서 '요지 아저씨'라고 불리는 평범하고 빈곤한 노인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은둔 생활을 해왔으나, 그가 과거 헝가리 왕의 적통이며 칭기즈칸의 혈통까지 이어받은 정당한 헝가리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이 민족주의 단체들에 의해 발견되면서 평온했던 삶은 깨어지기 시작한다.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준군사 조직들은 요제프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정을 복구하고 헝가리의 존엄을 회복하겠다는 집단적 망상에 빠져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발견'이 객관적 진실의 확인이라기보다, 특정 집단이 필요로 하는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즉, 요제프의 정체성은 그의 내면에서 출발하기보다 외부의 욕망에 의해 호출되고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개인의 망상은 곧바로 집단적 신념으로 전이된다.
정작 요제프 본인은 정치적 야욕이나 전쟁에 관심이 없으며, 단지 무료하고 외로운 삶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인정받고 조국을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구하겠다는 순진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제자'들은 훨씬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 그들은 요제프를 부다페스트 지하의 거대한 무기고로 데려가 자신들이 준비한 무력을 과시하며 전쟁을 예고한다. 이에 겁이난 요제프는 자신이 왜 정당한 권리를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이런 불일치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정통성'이라는 도덕적 상상과 '권력'이라는 현실적 메커니즘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를 드러낸다. 요제프에게 왕위는 인정의 문제이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왕위는 폭력을 통해 획득해야 할 대상이다.
요제프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국회의장실에 연락을 시도하지만, 이는 오히려 중앙 정부의 감시망에 걸리는 결정적인 실책이 된다. 현실의 권력자들에게 91세 노인의 왕위 주장은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한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대테러 부대는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요제프의 낡은 집을 습격한다. 비쩍 마른 노인을 체포하기 위해 국가가 동원한 과도한 무력은 블랙코미디의 극치를 보여준다. 요제프는 발로 차이고 땅에 짓눌린 채 수감되며, 그를 따르던 멤버들도 모두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 안에서 요제프는 자신의 반려견 죔레의 안부를 걱정하며 점점 더 깊은 우울과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결국 이 아름답고도 추악한 인생의 끝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결국 엿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과,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는 절망뿐이다.
2. 문체와 리듬: 의미가 아니라 상태를 강요하는 서술
이러한 서사적 구조, 즉 망상이 지연되고 긴장만 축적된 채 끝내 해소되지 않는 구조는 소설의 형식 자체와 긴밀하게 대응한다.
『죔레는 거기에』는 각 장이 하나의 문장으로 구성되는 형식을 취하는데, 그 한 문장이 수십 줄, 때로는 수십 쪽에 이르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단 한 문장의 소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불안과 희극이 결합된 내용이 중심이 되는 복잡한 주제로 이어지는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종말론적 분위기, 붕괴 직전의 공동체, 광기와 음모, 구원인지 사기인지 모를 상징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소설은 노인의 지리멸렬한 사고대로, 명확히 끊어지지 않고 쉼표를 통해 이어지며, 누가 말하고 누가 행동하는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 내용조차 무엇이 진실인지 확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노인이 정말로 왕의 후손인지, 애당초 700년 전 불확실한 역사의 '후손'을 입증하는 것이 의미 있는지조차 판단이 유예된다. 노인의 망상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그의 숨겨진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끝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작가의 문학적 형식을 규정짓는 가장 압도적인 특징은 극도로 긴 문장이다. 이러한 긴 호흡의 문장은 단순히 스타일의 과시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태도를 반영한다. 『죔레는 거기에』에서 작가는 이러한 문체적 특성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91세 노인의 망상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혼란을 단절 없는 언어의 흐름 속에 가두어 버린다.
작가의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파도를 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하며, 텍스트의 흐름 속으로 몸을 던져 사고의 전멸에 가까운 상태를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소설은 각 장을 한 문장으로 제시하는데, 이는 의식의 흐름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붕괴하는 세계를 형식 자체로 재현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서사적 전개보다 형식, 특히 리듬을 통해 독자에게 경험을 전달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해석을 더하자면, 이는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서사' 자체보다 그것을 담아내는 리듬을 전면화하는 전략이다. 다만 그 방식은 다르다. 『성』에서 성에 도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듯, 이 작품에서도 무엇이 망상이고 아닌지, 요제프가 실제로 왕이 되는지 여부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초반부에서 이미 드러나듯 그는 '불을 더 이상 떼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진지한 폭력 앞에서는 뒷걸음치는 유약한 노인이다. 그의 망상과 극우주의자들의 망상이 만나 만들어내는 답답한 리듬이 이 작품의 감각을 규정한다.
카프카가 같은 상황을 변형 없이 반복하고, 결론 없이 지연시키며 의미를 끊임없이 미끄러뜨림으로써 출구 없음의 구조를 드러낸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문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며 사건이 계속 지연되고 긴장만 축적되도록 만든다. 두 작가는 출구 없는 세계를 공유하되, 그 세계에 도달하는 경로가 다른 것이다. 이 반복은 단순한 정보의 반복이 아니라, 붕괴가 지연되는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장치다. '종말론적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구조를 가리킨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소설은 우스운 장면을 연속적으로 제시하지만, 그 웃음은 긴장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불안으로 미끄러지는 기능을 한다. 지리멸렬한 묘사와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 계속 이어지는 이 스타일은 자연스럽게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두 작가 모두에서 리듬은 음악적 장치가 아니라 압박 구조에 가깝다. 카프카가 규칙을 반복하여 독자를 질식시키는 방식이라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흐름을 과잉으로 밀어붙여 결국 붕괴에 이르게 한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이야기를 이해하기보다 하나의 상태를 견디게 된다. 이는 전통적 서사가 제공하는 경험을 넘어, 현대 소설이 도달한 하나의 극단적인 지점을 보여준다.
3. 주변부의 시선, 민족주의, 그리고 '죔레'라는 상징
소설의 주제를 고려할 때 카프카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프카는 제국의 주변부에서 중심의 언어로 글을 쓴 작가였다. 그는 체코어 환경 속에서 독일어로 글을 쓰며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녔고, 이로 인해 언제나 세계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밀려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역시 헝가리어라는 비주류 언어, 동유럽이라는 주변부 위치, 서유럽 중심 문학에 대한 거리감을 지닌 채 글을 쓰는 작가다. 이로 인해 두 작가는 공통적으로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밀려나 있는 시선"을 공유한다. 『죔레는 거기에』에서 암시되는 헝가리의 다문화적 역사와, 그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는 민족주의는 바로 이러한 긴장 위에서 형성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실제 존재하는 단체와 현재 활동하는 정치인들을 주저 없이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요제프를 따르는 준군사 조직원들은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 오히려 가련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정보와 소통에서 소외된 채 자신들만의 부족주의적 하위문화 속에 갇혀 있으며, 요제프라는 가공의 권위를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이는 현대 헝가리 시골 지역의 빈곤과 소외, 그리고 전통이 뒤틀린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는 사회적 병리를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는 결국 노인의 망상이 얼마나 얄팍한지, 동시에 그 안에 얼마나 강한 애정과 인정 욕구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파시즘에 대한 풍자이면서 동시에 "왜 인간은 그러한 환상에 매달리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
소설의 제목으로 제시된 '죔레'는 이러한 구조를 응축하는 상징이다. '빵'을 의미하는 이 이름은 초반에는 늙은 개로 등장하고, 이후에는 새로운 어린 강아지로 교체된다. 요제프는 아내를 잃은 이후 이 개와 함께 살며 강한 애착을 형성하고, '죔레'라는 이름을 대대로 이어준다. 왕이라는 기묘한 망상의 규모에 비해 '빵'이라는 이름은 지나치게 소박하며, 이 대비는 인물의 존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죔레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요제프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다. 그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자신의 심장은 죔레가 지니고 있다며 그를 데려와 달라고 울부짖는다. 이는 그가 세계와 맺고 있는 마지막 정서적 연결이 죔레라는 점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죔레'라는 이름은 한 마리의 개에 고정되지 않는다. 첫 번째 죔레가 죽은 뒤에도 새로운 개가 같은 이름을 이어받는다. 이는 "그곳에는 언제나 죔레가 있었다"는 식의 기묘한 지속성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 지속성은 실제 존재의 대체 가능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허한 위안을 제공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희망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마침표 없는 긴 문장을 통해 우리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의 질감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 끝이 "엿 같은 것"일지라도, 그 과정을 끝까지 응시하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윤리로 제시된다. 『죔레는 거기에』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견디는 방식에 대해,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문장으로 쓰인 가장 고통스럽고도 집요한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