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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내 죽음,

참으로 보잘것없는 죽음밖에 줄 수 없군요……"


프랑스 문학의 독보적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남긴

최후의 작품이자 영적 유언

 

 

깊은 영적 성찰로 죄와 은총, 악과 구원 등 초월적 문제를 탐구해온 '글 쓰는 그리스도인'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유작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정영란 옮김)가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작가 서거 이듬해(194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프랑스대혁명에 이은 공포정치의 종식(1797년 7월 27일) 불과 열흘 전에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 증폭된 인간의 불안과 공포라는 존재론적 문제를 희생적 죽음과 구원이라는 종교적 관점에서 응시하며 강렬한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한 역작이다.

 

1794년 7월 17일, 국민공회 정부 공안위원회의 명으로 체포된 콩피에뉴의 가르멜 수도원 소속 열여섯 명의 수녀들은 한 명 한 명 차례로 단두대에서 사라진다. 한 작은 수도 공동체가 겪은 이 사건은, 독일 작가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의 [단두대의 최후 여인](1931)이라는 서간체 역사소설로 앞서 형상화되었다. 베르나노스는 바로 르포르의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한 시나리오 대사 집필을 위촉받아 대사 작가로서의 작업에 착수했으나 육필원고만 남긴 채 그만 타계한다. "작가의 가방 안에 그냥 들어" 있던 이 원고는 그의 죽음 이듬해인 1949년, 평생의 후원자였던 평론가 알베르 베갱의 손질을 거쳐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라는 연극 형식의 대본으로 출간된다. 인물들의 영혼을 통과한 고백의 언어들로 교직되어 작가 특유의 영적 탐구를 더없이 강한 밀도로 응집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 사후 그를 그리워하던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더하여 1952년 연극으로 먼저 큰 성공을 거둔 후 프랑시스 풀랑크의 오페라를 비롯해 영화 및 영상화, 무수한 연극무대로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국내에도 1960년에 안응렬의 번역으로 소개된 바 있다.

 

1949년 베갱에 의해 처음 발표되고 장장 66년이 지난 2015년, 여섯 명의 공동연구진이 작가의 육필원고를 전면 검토해 새롭게 펴낸 개정판이 그 결실을 맺는다. 이번에 출간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는 새 판본을 따른 것으로, 베르나노스 전공자인 옮긴이 정영란의 섬세한 번역과 프랑스 역사와 사회, 종교, 가톨릭 용어 등을 두루 아우르는 상세한 각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덧붙여 베갱이 예전에 덧달았던 의미 있는 첨부 내용까지 잊지 않고 환기해두고 있다.

 

프랑스대혁명에 이은 공포정치의 극한 중에 실제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콩피에뉴 가르멜 수녀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의 중심에는 놀랍게도 문학적 가상 인물인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 '블랑슈 들라포르스'가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출생 내력,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용기와 힘을 뜻하는 가문의 이름('들라포르스')에 값하지 못한다는 자책에 늘 시달려온 그는 극심한 공포심을 피해 가르멜에 들어간다. 그러나 혁명의 소용돌이는 봉쇄 수도원 가르멜에까지 닥치고, 순교를 서원했던 블랑슈는 혁명당원들의 방화와 약탈 속에서 공포에 질린 나머지 스스로 발한 순교 서원을 뒤로하고 수녀원에서 도망친다. 본가 저택에 은신하며 굴욕의 나날을 견디고 있던 블랑슈는 동료들이 비밀 집회 및 반反자유 서적 소지 등의 이유로 체포되어 파리로 호송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형선고 당일,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광장. 수녀들의 처형이 끝나가는 시점에 누군가 군중을 헤쳐 나오며 단두대를 향해 나아간다. 바로 블랑슈다.

 

최후의 순간, 저버린 듯 보이던 순교 서원을 돌연 자유롭고 해맑게 이루면서 세상 논리를 초월한 용기, 영적 생명력을 증언하는 블랑슈를 통해 베르나노스는 종국적으로는 죽음, 더 나아가 죽음 너머에서 생명을 구하는, 존재의 극변까지 감행한 인간의 내적 모험이 고대하는 한 편의 구원의 드라마를 펼쳐 보이며 인간 삶의 가치 지향에 대한 성찰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신학자 발타자르가 '교회의 사람'이라 부르며 비중 있는 연구서를 내기도 한 '그리스도인 베르나노스'의 신학과 영성이 밀도 높게 응축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그 다성적 대화들은 대혁명기라는 원경遠景, 그러나 바싹 다가온 그 위협 때문에 더 절절해진, 그리스도의 가난한 죽음에서 비롯하는 가난의 신비에 대한 작가의 묵상이 여러 인물을 통해 대변된다. 그리스도의 '가난의 정점'이 친히 겪은 십자가상의 대속代贖의 죽음이기에, 대박해의 시대를 맞아 그리스도의 가난을 끝내 따르려는 가르멜의 딸들은 이중의 촉구를 받으니,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오던 수녀들은 정작 그 평화로부터도 '가난'해져야 하는 목숨의 이타적 자헌自獻을 사랑으로 서원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을 참존재의 어린이로 회복시키는 가난의 정신이 악과 교만의 정신을 이겨내는 놀라운 초월적 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죽음의 연대 혹은 신비, 나아가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비가시적 세계가 생생하게 현현한다. 일례로 작중 원장 수녀와 블랑슈, 콩스탕스 수녀의 죽음을 통한 연대를 주목해 읽어볼 일이다. 그 연대는 실제 가르멜의 성녀들로 승계되고 있다는 점도 각주에서 짚어두었다.

 

이처럼 죽음, 특히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의미에 대한 다층적인 긴 묵상을 제공하며 전개되는 이 희귀한 작품은 단편적 역사극이나 순교극, 종교 교리의 일방적 번안에 머무르지 않고, 특정 종교의 틀을 넘어 가치에 대한 성찰로 보편 독자들을 이끈다. 특히 침묵의 숭고미가 압도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부조리와 비열, 폭력과 공포, 그 모든 인간사를 숭고한 자헌의 죽음으로 넘어서는 숨 막히도록 지순하고 아름다운 신비적 전례극의 인상을 창출하면서, 이 각별한 작품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기술적 영화 시나리오라기보다는 깊이 모를, 말하자면 신학적 문학 대화극으로 수용 음미하게 한다. 아울러, 실제 단두형으로 순교한 그들, 오래 '교회의 맏딸'로 존중받아왔으나 치욕적 역사에 휘말려 들었던 프랑스의 수녀 열여섯 명은 202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는 교회사적 사실도 그들의 '무장해제된, 무장을 해제하는' 죽음을 일찍이 깊이 헤아린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의 울림을 더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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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베르나노스

Georges Bernanos(1888~1948)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북부 파드칼레의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 참전해 수차례 부상을 당했고, 종전 후 보험회사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던 중 1926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 [사탄의 태양 아래]가 문단에 돌풍을 일으키며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29년에는 [기쁨]으로 페미나상을 받았다. 1933년 오토바이 사고로 중상을 입어 평생 목발에 의지한 삶을 살았으며, 생활고로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서 지내는 동안(1934~1937) 스페인내란을 고스란히 목격한다. 1936년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다. 1938년부터 최후의 소설 대작이 될 [윈 씨](1946) 외에 다른 소설 집필을 접고 정치 및 사회, 문명 비평에 전념한다. 브라질로 이주한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무수한 '투쟁의 글'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5년 샤를 드골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으나 입각 제의를 뿌리치고 독자적 집필을 계속한다. 1947년 튀니지에서 생활하면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를 집필하고, 1948년 지병이 악화되어 파리로 호송된 후 같은 해 7월 5일 파리 근교의 병원에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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