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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끝나지 않는 아Q의 정신승리법 [도서/문학]

그가 후세에 남긴 것

by 김지연 에디터
2026.06.0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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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아Q정전〉은 1921년 12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신보부간》에 매주 혹은 격주로 발표되었던 소설이다.

 

작품 속 ‘아Q’는 이름과 본적은 물론 행적조차 불분명한 존재지만, 그의 명확한 특징은 단연 ‘정신승리법’이다. 극단적인 자기합리화로 얼룩진 그의 삶을 통해 작가가 겨냥한 진실은 무엇인가.

 

 

 

모두가 비웃은 그의 ‘정신승리법’




“아이들에게 맞은 거라고. 요즘은 정말 말세라니까.”

그러고는 자신도 만족스러워 득의양양하게 가버렸다.

 

아Q는 자신이 마음속에서 생각했던 것을 늘 뒤에 가서 떠들어대곤 했다. 그래서 아Q를 놀렸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이 같은 정신적인 승리법을 알고 있었다.

 


아Q는 종종 웨이짱의 건달들에게 놀림을 받고 얻어맞을 때마다 정신승리를 한다. 모든 고통을 아이들의 짓으로 돌리는 이 자기합리화는 그의 처지를 잠시나마 위안하는 방패가 된다.

   

 

그는 스스로를 자기 비하의 제1인자라 여겼다. ‘자기 비하’란 말만 빼면 어쨌든 ‘제1인자’가 된다. 장원급제도 ‘제1인자’ 아닌가!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이는 결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다. 아Q는 고도의 정신승리법을 동원해 자신을 치켜세운 뒤, 주점에서 술을 퍼마시고 토곡사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이러한 반복은 정신승리법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 반복 자체가 정신승리법을 생성하는 동력이 된다.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따질 겨를조차 없는 아Q에게, 정신승리는 당장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유일한 생존 수단이다.

 

 

그는 오른손을 불쑥 치켜올리고는 자신의 뺨을 두 차례나 힘껏 후려쳤다. 화끈거리면서 아프기까지 했다. 실컷 때리고 나자 그때서야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어쩐지 때린 것은 자기고 맞은 사람은 남인 것 같기도 했다.

 

 

아Q는 핍박하기보단 핍박받는 위치에 놓여있다. 도박판에서 돈을 따기 직전, 그는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흠씬 두들겨 맞고 돈마저 잃는다. 그는 잠시 슬픔을 느끼지만, 이내 태세를 전환해 자신의 뺨을 때린다. 지금까지의 정신승리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였다면, 이 지점에서의 자해는 자기 파괴적인 합리화에 가깝다. 아Q는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면서까지 정신승리에 매달려 연명한다.

 

아Q 역시 치욕과 분노, 슬픔을 느끼지만,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 고안해 낸 정신승리법 때문이다. 이는 결코 건강한 생존 방식이 아니며,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내면을 파먹는 비극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사실 아Q는 이야기의 결말보다 더 먼저 죽어버린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는 웨이쫭에서 남의 일거리를 받아 근근이 연명하며, 마땅한 거처 없이 토곡사에서 지낸다. 건달들에게 붙잡혀 폭행당하기 일쑤이며 지독한 피해망상에 시달린다. 주변의 멸시 속에서 위태로운 목숨줄을 부여잡게 하는 그의 비합리적인 정신승리는, 타인이 보내는 노골적인 경멸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없는 그가 선택한 도피처이다.



 

고작 O으로 이루어진 허위 서명 


 

 

아Q는 엎드린 채 젖먹던힘까지 다해 원을 그렸다. 그들이 비웃을까 봐 최대한 둥글게 그리려 했지만 묵직한 붓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신히 이어붙이려는 순간 그만 붓이 밖으로 튕겨 종이 위의 원은 호박씨같이 되고 말았다.

 

(.....)

 

때로는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릴 때도 있으며 어쩌다 비뚤게 그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도적 누명을 쓰고 수감되었다가 대청으로 끌려 나온 아Q는 영문도 모른 채 자백 서명을 강요받는다. 동그라미를 그려도 된다는 민 영감의 말에 순순히 붓을 드는 아Q의 모습은 우리에게 우스꽝스럽게 다가온다. 글을 쓸 줄 모르는 그가 동그라미도 글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허위 자백을 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그의 우매함과 주체성 결여를 읽어낸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왜 우리는 그를 이토록 어리석은 인물로만 치부하는가. 글을 배우지 못해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왜 단순히 바보 같은 행동으로 전락해야 하는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시스템의 의도대로 조종당해 스스로 허위 자백의 덫에 빠진 이를 가엽게 여기기보다 어리석다고 비웃는 시선이야말로, 루쉰이 비판하고자 했던 폭력은 아닐까. 무엇보다 아Q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만을 탓하기에는,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위선 또한 그에 못지않다.

 

아Q는 자신이 그린 동그라미가 호박씨처럼 일그러진 것을 보고 잠시 자책하지만, 이내 특유의 정신승리로 상황을 덮어버린다. 치욕스러운 순간마다 모든 잘못을 아이들이나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그의 고도화된 자기합리화는 처형 직전까지 이어진다. 자신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는 타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전전긍긍한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누구보다 타인의 평가에 강력하게 매여 있는 인물이 바로 아Q이다.

 

 

 

예상된 정신승리법의 결말


 

 

불만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아Q는 은복숭아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혁명을 해야 한다.

 

 

아Q가 느끼는 불만과 소외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정작 어떠한 집단에도 소속되어 본 적 없는 그가 소외감을 느끼고 불만을 품는 이유는, 혁명당 행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수재의 가슴에 달린 은색 복숭아는 단순한 휘장이 아니라 자유당의 권력을 상징하며, 한림과 맞먹는 위세를 과시하는 수단이다.

 

아Q에게 혁명이란 먼 미래를 향한 대의가 아니다. 그저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즉각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일 뿐이다. 이는 장기적인 계획이 아닌, 오늘 당장 이루어져야 할 보상을 갈구하는 행위이다. 인내심 없이 당장의 이익에만 매몰되는 그의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승리법 또한 같은 선상에 놓인다. 순간적인 정신승리가 장기적인 긍정적 결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현실과 정반대 방향으로 근거 없이 밀어붙이는 정신승리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파멸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당대의 민중에게 미래의 파국을 고려할 여유가 있었겠는가. 아Q는 당시 하층민의 비극적인 단면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눈앞의 생존을 해결하기에도 급급했던 이들에게 정신승리는 일종의 필수적인 방어기제였다. 도저히 합리화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정신승리에 의존하여 겨우 오늘을 버텨내고 있었다.

 

 

 

아Q의 유산, 우리 시대의 정신승리


 

 

...웨이쫭 사람들은 아Q가 나빴다고 했으며 그가 총살당한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했다. 나쁘지 않았다면 왜 총살까지 당했겠는가? 그러나 성내의 여론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불만이었다. 역시 총살형은 머리를 치는 것보다 볼 만하지 않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형수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시위당했으면서도 창극의 노래 한 구절 부르지 못했으니......다들 헛걸음만 했을 뿐이었다고 푸념들이었다.

 

 

아Q는 나빠서 총살당한 것이 아니라, 총살당했기에 나쁜 사람이 되었다. 작가가 고발하고자 했던 중국의 구사회와 민중은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비극의 근원을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총살이라는 결과가 원인보다 우선할 수는 없음에도, 그들은 오직 결과만을 통해 대상을 비난한다. 가장 핍박받고 고통받던 하층민 아Q는 그렇게 혁명 과정의 비극적 피해자로 전락하고 만다.

 

민중의 여론을 돌이켜보면, 그들의 행태야말로 또 다른 정신승리임을 알 수 있다. ‘총살당했으니 나쁜 놈일 것’이라는 논리는 지방 정부의 처벌에 의문을 품기 두려운 이들이 선택한 비겁한 자기합리화다. 생전 아Q의 정신승리를 비웃던 이들이, 정작 그가 죽자 그보다 더한 방식으로 정신승리를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혁명 과정에서 아Q는 왜 그토록 허무하게 소모되는가. 그가 누구에게나 가장 만만한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혁명당 행세를 하던 파총은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아Q를 공개 처형했고, 그는 타인의 체면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비극적 부속품에 불과했다.

 

평생을 정신승리법으로 연명해 온 아Q도 결국 총살형이라는 파멸은 피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정신승리법이라는 생존 전략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는 생존의 수단은, 결국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소멸하고 만다.

 

성명도, 본적도 불확실했던 아Q가 후세에 남긴 것은 오직 정신승리법이라는 유산이다. 그가 죽은 뒤에도 민중들이 그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보면, 자기합리화라는 이름의 이 비겁한 생존 방식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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