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개 같다고 말했던 이가 있었다. 우습거나 재미있게도 빠르게 생을 진단해 버린 후 아주 쉽게, 삶은 고개와도 같은 거란다, 고개를 끄덕이던 어린 사람이 있었다. 유독 삶이 아주 낮은 곳과 높은 곳을 반복했더랬다. 고개를 넘고 넘어서! 자신의 ‘진짜’만을 담은 것처럼, 명랑한 척을 하며 중얼거렸다. 알아챈 이 있겠지만 이건 나-에디터 본인-에 대한 서술이다.
그리고 “즐거운 난기류”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 언뜻 보면 그는 시대의 정공법을 거스른 역설법을 즐겨하는 이 같다. “나쁘게 눈부시”는 법을 알거나, “즐거운 난기류”를 파악한 사람이다. “우리는 난기류에서 만나 끄덕여온 모든 시간을 철회하고 바닥을 나눠 가지게 되니까 좋”(「대공황」)다고 말하는 시인. 그러니 고개나 난기류같이 갑작스럽게 떨어지고 올라감을 반복하면서 흔들리는 것들, 하지만 절대 추락하거나 무너질 일 없다는 공식을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것은 우리의 “바닥”을, 즉 끝과 끝을 보여줄 수 있기에 즐거운 것이라고 읽힌다.

『나쁘게 눈부시기』는 한 권으로 여러 개의 계절을 통과하는 시집이다. 서윤후의 다섯 번째 시집인 이 책은 새해를 축복하는 단어를 제목으로 둔 「근하신년」을 시작으로 펼쳐진다. “눈”, “골목”과 “빗자루”, “축복”과 같이 시인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단어는 눈 내리고 코 시린 골목의 어느 겨울날을 느끼게 만든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왜 다 우는 것처럼 들릴까. 작년 일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나를 낳고 찾아오지 않듯이.”(「근하신년」) 라고 서술한 부분은 외로운 짐승으로서의 인간이 아이를 낳고 계절이 순환하듯 삶이 순환하는 장면을 언뜻 비춘다.
그리고 시집은 순간순간 여름을 회상한다. “여름을 불거져오게 하려고/어떤 미움은 끝내지 않기도 했다”(「여름 테제」)고 말하거나 “네 편지에 적혀있던 (숲이 비어있다)는 말을 오랫동안 생각하는 일”(「하록수림」)은 진녹색으로 가득 찬 숲을 환기하며 식물의 잎이 무성해지는 계절로 들어가게 만든다. 결국 『나쁘게 눈부시기』는 하나로 단언할 수 있는, 차갑고 뜨거운 느낌의 시집이라기보다는 일 년에 극과 극의 온도를 지나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가까이 담은 시집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 『나쁘게 눈부시기』에 존재하는 고독은 겨울의 것이거나 다른 계절의 것이라고 단언하기에 어렵다. 그리고 시인은 그 고독이 춥고 외로운 것, 그리하여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전달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양생 중인 바닥을 갖고 싶다
지금은 도착에 대해 생각 중이니까
기다리는 동안 너는 어떤 무지가 될래?
약속에 늦는 사람은 내 기다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
어둡고 깊은 곳에
나는 먼저 와 물을 따르는 사람
매일 시동 거는 꿈을 뒤척이고
난분분한 바닥을 짐작했으며
떨어지는 법을 쌓아 추락을 지연시킨다
(중략)
그 후로 나는 도착하지 않는 생각이다
흐드러진 벚나무 보며 걷다가 양생 중인 바닥에 발자국 하나 살며시 남기고는
신발 밑창을 다시 콘크리트 바닥에 긁으며 나아가는
사람의 운세가 되고 싶어진다
약속에 늦게 나타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길 하자
자꾸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고
그가 나를 근처 스키야키집이나 우동집에 데려가면
나는 뜨거운 국물 앞에서
양생 중인 바닥을 잊고 만다
그건 내가 지워지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뜻
—서윤후, 「미도착」 부분
양생한다는 것은 콘크리트 작업 중에 이것이 단단하게 굳을 수 있도록 온도, 습도, 충격 등을 조절해 가며 보호하는 작업을 말한다. 「미도착」 속 화자는 “어둡고 깊은 곳”에 “먼저 와 물을 따르는 사람”임과 동시에 “흐드러진 벚나무 보며 걷다가 양생 중인 바닥에 발자국 하나 살며시 남기고” 가는 사람이자 “사람의 운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즉, 인간으로서 겪는 고독과 외로움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양생하는 콘크리트 바닥처럼 물렁한 삶의 바닥임을 알고자 한다. 그것이 연약한 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키야키집이나 우동집”에서 “뜨거운 국물”을 마실 때면, 불완전한 나로서의 “양생 중인 바닥”은 잊힌다. 이는 양생의 과정을 거쳐 단단해져야 하는 콘크리트가 의도된 순서를 잊고 다시 뜨거운 김을 만나 녹아내렸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삶의 “뜨거운 국물” 앞에서 말랑해져 버리는 삶이 서윤후가 그리고자 하는 삶 속 희망이 아닐 리 없다.
삶은 이야기가 된다. 시인은 “이야기의 괴로움”을 노래하면서도 타인에게 내미는 손바닥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중략)
반듯하게 나눠 가진 이야기도 있었어요
홀로 문밖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접시 위 레몬케이크 조각
향초 클래스에서 만든 천사 형상의 석고 방향제
이야기를 닮았지만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처럼
약속을 어기자 우리가 되어버렸잖아요?
멀리 있어서 애틋하고 안심이 됩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을 모두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나는 구부리지는 않습니다
멋쩍게 녹차를 내올 때 누군가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면
차가 식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있어요
빈 강의실에 혼자가
어울리는 사람에게 매달아주고 싶은 내가
할 이야기가 더 남았다는 듯
선생님은 물끄러미 제게 묻습니다
당신은 혹시 누구의 이야기였던가요?
(중략)
간추릴 수 없을 만큼 퍼져가는
풍만하고 비만인 천사가 도도새처럼 날아가요
턱을 괴고 한참을 서성거려도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는 게
선생님은 믿기시나요?
혼자 비를 맞고 계신가요?
—서윤후, 「이야기의 괴로움」 부분
“이야기”는 살아오면서 겪었던 괴로움을 시사한다. “빈 강의실에 혼자가/어울리는 사람에게 매달아주고 싶은” 나는 고독한 사람을 뜻하는 것 같지만, “나”는 홀로 떨어져 고독함을 즐기는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면/차가 식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며 이야기로 대변되는 삶의 괴로움을 나누고 나누어지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한다.
“접시 위 레몬케이크 조각”이나 “천사 형상의 석고 방향제”처럼, 진짜를 모방하여 만들었지만 진짜가 되지 못한 것들을 화자는 “이야기를 닮았지만/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삶을, 삶 속 괴로움을 뜻하지만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동시에 “선생님”은 나에게 당신도 누군가의 이야기임을 물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괴로움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임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이야기의 괴로움, 즉 삶 속 괴로움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며 의문문을 통해 손을 내밀 듯 서로를 희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을까.
고독하거나 괴롭다는 걸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난기류가 즐거운 것이 되었듯, 서로가 서로의 바닥을 바라보는 일이 좋은 것이 되었듯이 말이다. 서윤후의 5번째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는 춥고 괴로운 것으로 규정된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괴로움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희망의 빛을 놓지 않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는 최선의 위로가 아닐까.
*이 글에 인용한 모든 시는 『나쁘게 눈부시기』에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