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항상 우울이 놓여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유쾌하게 웃고 있는 표정 뒤에도 언제나 그런 마음이, 우울한 정서가 조용히 깔려있는 것 같다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의 말이었기에 나도 내가 그런 것 같다고, 아무래도 나는 좀 우울한 사람인 거 같다고 말했다. “글쎄, 그건 어쩌면.” 내가 문학을 꽤나 좋아해서 그런 것도 같다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우울한 사람인 게 잘못은 아니지만 괜한 핑계라도 대고 싶어서였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우울하게 쓰인 문학처럼 우울해지거나, 우울한 문학을 쓰는 사람처럼 우울해지나. 그렇다면 위트로 쓴 문학, 재미로 쓴 시, 그런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나는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될까.
하상욱 시집 『서울 보통 시』(21세기북스, 2024)를 읽는다.
대체로 단정한 작가의 소개, 왠지 비장한 작가의 말, 질서정연한 목차 따위도 거부해버리는 시집이 있다. 작가 소개는 소(牛)와 개(犬) 사진으로, 작가의 말은 말(馬) 사진으로 과감히 갈음해버리는 시집. 첫 페이지부터 실소를 자아내도록 치밀하게(혹은 일부러 허술하게) 설계된 이 시집은 적어도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우울이라는 감정을 공유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 / 나온거니 // 안 / 불렀는데
- 하상욱 단편 시집 ‘배’ 中에서
싫다 / 는데 // 자꾸 / 붙네
- 하상욱 단편 시집 ‘살’ 中에서
대충 배와 살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볼까. 싫어서 부르지 않았는데 자꾸 나와서 붙어버리는 것들. 때론 웃기기도 하고 어쩔 땐 우울하기도 한, 거울 앞에서 혹은 타인의 눈빛 앞에서 괜스레 창피해지는 것들을 시인은 ‘단편 시집’이라는 이름 아래서 다정히 호명한다. 싫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걸 힘겨울 만큼의 상처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단단한 마음이 몇 글자로 된 짧은 문장에 숨어있다. 그토록 씩씩한 마음은 역시나 “타고 / 났”(‘식욕’)을까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겨보면 또 마냥 그런 건 아닌 것도 같고.
다시시작 / 하는건 // 처음보다 / 어려워
- 하상욱 단편 시집 ‘자다 깼는데 잠 안 옴’ 中에서
자다가 깨면 나와 같이 깨어나 머릿속에 솟구치는 생각들. 온갖 생각의 자극 앞에서 다시 잠드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므로 시인도 아마 나와 같은 밤을 지새운 적 있을 테다. 시인이란 역시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스쳐간 수많은 생각 속에는 단연 슬픔도, 우울도, 걱정도, 비관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 유쾌한 시인은 마냥 타고난 유머의 재능과 경험만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지금껏 씨익 웃으며 피식 웃기는 시들을 써낼 수 있는 건 “방법이 / 없잖아 // 하라면 / 해야지”(‘약관동의’) 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웃음 외에는 삶의 우울을 이겨낼 다른 방법이 딱히 없으니, 언뜻 보면 슬픈 일 앞에서도 기어코 웃음의 흔적을 찾아내겠다는 각오. 그렇게 살고야 말겠다는 다짐. 하상욱의 유머가 그토록 단단한 각오로 느껴질 때 하상욱 시의 진짜 미학은 ‘비장미’가 된다.
유쾌한 시들에서 기어코 비장미를 찾아내고 있는 궁상맞은 내 마음은 어쩔 줄 모른다. 그러니 그냥 한번쯤 상상해보는 거다. 쾌활보다 우울이 익숙하고 또 편한, 그러나 마냥 우울 속에 잠겨 허우적대며 사는 것은 아닌 나를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다시 / 돌아간다면 // 행복 / 할수있”(‘연휴 첫 날’)으니 서둘러 우울을 몰아내라고 말해줘야 할까. 아니, 그건 좀 이상하다. 필요할 때마다 가슴속에 묻어둔 우울을 가끔씩 꺼내먹을 수 있는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고, 또 앞으로도 마냥 행복할 것만 같은 예감 속에 살고 있으므로.
카페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그러나 속으로는 피식대면서) 하상욱의 시를 읽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앉아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나 고백했다가 차였잖아. 존나 우울하다. 씨발.” 깔깔 웃으며 우울함을 말하는 학생에게서 어쩐지 하상욱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울하고 행복한 꼰대로서 그 대화에 슬쩍 끼어들어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나. 왜 차였니. 걔는 뭐 얼마나 잘났다니. 그렇게 한참을 같이 웃다가 해가 기울면 제법 슬픈 표정으로 멋지게 한마디 남기며 떠나는 거다. 우울과 행복이 꼭 반대말인 건 아니라고. 우울한 나와 쾌활한 당신, 세상의 반쪽씩 나눠 맡던 우리가 이곳에서 우연히 만나 섞이던 일이 나는 꽤 즐거웠다고. 우울하게 즐거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