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럼에도 사랑해야 한다 [문학]

생은 사랑의 실패와 시작으로 가득하다
글 입력 2022.09.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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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지금도 수많은 폭력과 혐오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권력들은 자신의 몸집을 유지하거나 불리기 위해 소수를 짓밟는다. 이기적인 누군가는 숲을 없앤다. 무지한 집단은 섣부르게 판단하고 상처를 주면서 희열을 느낀다.


아쉽게도 세상에는 희극보다 비극이 훨씬 더 많다. 희극의 개체 수가 너무 적은 것이 불안했는지 몇몇의 사람들은 사람들을 웃기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도 했다. ‘코미디언’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웃음과 소소한 위안을 얻는다.


그렇지만 웃음만으로는 비극에 대항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비극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놓지 않는 시인이 있다. 오래된 거리처럼 묵묵하고 단단하게,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의 시인’ 진은영이 오랜만에 새 시집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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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가 발간되었다. 2012년 발표된 <훔쳐가는 노래> 이후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다.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시인은 여전히 깊이 있는 상징으로, 단단한 리듬으로, 섬세한 심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사랑’이다. 비극이 가득한 세상에서 태어난 사랑의 모습들이 시집의 이곳, 저곳에서 눈에 띈다. 청혼을 하는 연인, 세월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 용접기를 든 노동자. 시인은 그 모든 곳에서 사랑의 징후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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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유리조각처럼

 

- <청혼> 전문

 


화자는 ‘오래된 거리처럼’ 애인을 사랑한다. ‘오래된 거리’ 같은 사랑이란 뭘까.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랑일까. 혹은 오래된 거리 위 시대에 맞춰 몸 바꾸는 가게들처럼 애인에게 맞춰 끊임없이 변화해온 사랑일까. 둘 다일지도 모르지만.


이 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마지막 연이다. 예수가 인류를 위해 독배를 들이키듯, 화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쓴잔을 마셔야 한다. 그 잔에는 유리조각 같은 슬픔이 담겨 있다. 몸속은 유리조각으로 인해 긁히고 상처나고 쓰라리겠지만, 화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쓴잔을 마실 수 있다.


청혼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을 같이 느끼고 아파하겠다는 결심이 아닐까. 세상이 비극으로 가득 차 있듯, 개인의 인생에도 수많은 비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 분의 비극을 평생 안고 살겠다는 다짐은 얼마나 무모한가. 아마도 그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그것을 해내보겠다고 덤비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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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

도끼의 두 귀처럼 때떄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싶다

베여 나간 나무 밑동의 향기에 인사하듯 길게 구부러지는

너의 훌쩍 자란 등뼈를 만져보고 싶다

 

-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부분

 

 

이 시집에는 세월호와 관련된 시들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그날 이후>, <천칭자리 위에서 스무 살이 된 예은에게>, <아빠> 등의 시를 읽으면, 2014년의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누군가는 벌써 8년이나 지났다고 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조금은 밀려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계속해서 발화한다. 수많은 오점들이 겹쳐 일어난 비극을 아직 기억해야한다고, 이토록 억울한 죽음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들 대신에 그들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남겨놓는다. 이 시편들은 그들의 사랑이기도 하면서, 시인의 사랑이다. 여전히 세월호의 상처를 보듬어보고자 하는 시인은 계속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발송한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어쩌면 시인의 사랑은 똑같은 비극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악착을, 그 악착들이 가득한 미래를 낳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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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마지막 시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하루의 끝이 자살처럼 느껴질 정도로, 세계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이 비극에 사랑으로써 대항해 보려 한다. 존재의 비극을, 욕망과 권력이 낳는 슬픔들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어쩌면 사랑은 감정보다 앞선, 근원적인 무엇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사랑의 획득에서 비롯된다. 외로움은 사랑에 대한 갈망에서 태어난다. 슬픔은 사랑의 배신으로부터, 공허함은 사랑의 부재로부터 생겨난다. 사랑의 상태에 따라 우리들의 감정과 행동은 달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외쳐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힘으로 우리는 세상의 비극과 맞설 수 있다.


사랑이 세상의 비극을 부수는 유일한 도구임은 틀림없다.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눈앞에 닥쳐오는 비극에 맞서야 할까. 오늘도 진은영 시인은 사랑의 칼날을 단련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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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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