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여름 개봉했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초록 츄리닝과 바가지 머리의 동구가 생생히 기억난다. 김수현이 연기했던 동네 바보. 알고 보면 북한 최정예 특수공작 5446 부대의 엘리트 요원 '원류환'이다. 그 아이러니한 설정 하나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개봉 당시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여름을 뜨겁게 달궜고, 인기에 힘입어 뮤지컬로까지 제작되었다.
그 이야기가 뮤지컬로 만들어진 지 올해로 10년이 됐다.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 THE LAST>가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카드홀에 돌아왔다.

뮤지컬로 돌아온 은밀하게 위대하게 속 세계관은 영화를 그대로 무대로 옮겨논 것 같았다.
특히 동구의 싱크로율이 영화와 판박이었다. 무대 위에서도 특유의 어정쩡한 자세로 다니고, 해맑게 네! 대답하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바보 동구. 뮤지컬 특성상 동구 캐릭터의 목소리 톤이 더 올라가면서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인상도 생겼는데, 그게 또 나쁘지 않았다. 웹툰을 찢고 나온 싱크로율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초연인 2016년부터 추정화 연출이 10년째 함께 해온 작품인데, 그 오랜 시간이 동구라는 캐릭터를 얼마나 정밀하게 분석해왔는지 작품을 보며 느껴졌다.
가장 웃음 지으며 봤던 장면은 "동구야 배달"넘버다. 뮤지컬의 묘미 드러났고 유머스러웠다. 동구가 묵는 주인집 슈퍼에서 달동네 골목을 누비며 집집마다 심부름을 하는 바쁜 하루를 표현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앙상블 배우들이 전부 동구와 똑같은 초록 트레이닝복과 같은 가발을 착용하고 하나 둘 씩 무대 위로 나타난다. 일사분란하게 무대 위를 구르고 뛰고 점프하며 다닌다.
동구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심부름을, 빠르게 뛰어다녔는지 느껴졌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연출이었다. 이어서 슈퍼문을 열고 주인집 할머니를 따라 동구의 클론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상황 자체가 유머스러워서 짙어서 웃음이 났다. 뮤지컬로 재탄생한 작품에서 영화나 웹툰에서는 불가능했던 상상력을 열어준 순간이었다.

무대를 뒤흔든 라이브 액션씬
이 공연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군무였다. 단순히 춤이 예쁘다거나 안무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수십 명의 배우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 에너지 자체가 압도적이었다. 이번 10주년 시즌에는 서정주 무술감독이 새롭게 합류했는데, 영화 〈올드보이〉, 〈아저씨〉 같은 스크린 액션과 뮤지컬 〈그날들〉 등 무대 액션을 모두 섭렵한 감독이다. 그 영향인지, 이번 시즌 액션의 밀도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11명의 앙상블이 아크로바틱, 무술, 비보잉, 군무를 무대 위에 쏟아냈다. 북한에서 최정예 군사가 되기 위해 부대원끼리 싸우는 장면, 한국에서 주인집 할머니를 괴롭힌 조폭과 싸우는 장면, 국정원 요원들과 원류환과 친구들이 싸우는 장면 등 앙상블들과 주연 배우들이 함께 뒤엉키며 액션을 하는 긴박감있는 장면이 연출됐다.
특히 무대를 넓게 쓰는 공간 구성 덕분에 입체적인 느낌이었고, 대극장 공간을 제대로 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라면 카메라 편집으로 처리될 격투를 배우들이 실시간으로 무대 위에서 표현하니, 그 생동감이 스크린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느낌과 에너지를 줬다. 이런 스타일의 뮤지컬은 처음이었다. 군무와 액션이 결합된 장면에서는 박수가 절로 나왔다.

김찬호, 서동진, 민규 그 목소리들
이날 관람한 캐스트는 원류환 역의 김찬호, 리해랑 역의 서동진, 리해진 역의 민규(DKZ)였다. 세 배우가 각자 다른 색을 갖고 있어서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가장 먼저 압도한 건 김찬호와 서동진의 성량이었다. 2023년 5연부터 함께해온 김찬호는 원류환의 고뇌와 동구의 순박함을 오가는 폭이 넓은 배우다. 특히 감정이 폭발하는 넘버에서 무대를 꽉 채우는 목소리의 밀도감이 인상적이었다. 스피커 없이도 귀가 울릴 것 같은 그 힘 덕분에 인물의 그떄 그때 감정에 몰입할 수 있고 이야기의 감동이 훨씬 깊게 다가왔다. 서동진 역시 4연, 5연에 이어 이번 시즌도 리해랑으로 돌아온 만큼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깊이있다는 게 느껴졌다. 특히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락커 지망생이라는 컨셉이 몸에 베여 나오듯이 자연스러웠다. 민규는 세 명 중 가장 풋풋한 연기를 보여줬다. 5446 부대의 최연소 조장이자 원류환을 동경해 남한으로 내려온 고등학생 리해진. 그 혈기왕성함과 소년다운 순수함이 묘하게 섞이고, 원류환을 향한 애틋한 동경이 잘 살아있었다.

무기가 된 아이들
이야기의 뿌리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곳에 있었다. 원류환, 리해랑, 리해진 이들 셋은 어린 시절부터 국가의 도구로 키워진 간첩들이다. 북한 남파 특수공작 5446 부대의 엘리트 요원들로, 선택의 여지 없이 나라를 위한 무기가 되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목숨 걸고 훈련 받았으며, 임무가 끝나면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이었다. 뮤지컬에서는 이 부분이 영화보다 날것으로표현된다. 북한 체제의 사상, 그 안에서 인간의 인격이 어떻게 지워지는지가 대사와 넘버를 통해 거침없이 드러난다.
무대 배경에 북한 국기가 커다랗게 펼쳐지고, "조선민주주의공화국 만세!"가 대한민국 한복판, 극장 안에 울려 퍼지는 장면은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이 작품이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구호에 아무 의심 없이 복종해온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관객도 그 공기를 한 번쯤 마셔봐야 하니까.
어린 소년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눠야 했다. 단순한 드라마적 장치를 넘어서서 독재 체제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게 무대 위에서는 더 선명하게 보였다. 공산주의, 독재, 인간의 인격을 말살하는 사회규칙까지.
동구의 사연은 더 씁쓸하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조직의 말에 복종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정작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믿었던 정부의 손에 희생됐다. 그것도 모른 채 끝까지 충성해온 동구. 그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김찬호의 세계가 무너지는 연기는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 것
이 세 인물의 진짜 이야기는 빨래를 하며 나온다. 친형제는 아니지만 달동네에서 함께 살며 진짜 형제가 된 이 셋이, 서로의 꿈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이다. 비장하다가 웃기고, 웃기다가 또 뭉클한 이 관계가 공연 내내 그랬듯, 이 장면도 그렇다. 형님은 꿈이 뭐예요?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는 거." 아, 너무나도 소박하다.
이 대사가 앞서 쌓아온 북한 체제의 서사와 겹치면서 그 무게가 배가 됐다. 동구는 이곳에 와서야 처음으로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매일 상 앞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고, 걱정해주는 형도 생기고, 친구들과 소소한 웃음을 짓고, 떠나는 이유도 묻지않고 통장을 쥐여주는 사람도 생겼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가족의 온기였을 것이다. 그 달동네가 동구에게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평범하게 태어났으면 우리랑 다를 게 없었을 텐데. 그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이들의 운명이 괜히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누가 이들의 평범하게 살 자유를, 소소한 행복을 뺐었을까.

뮤지컬에서 이런 식의 대규모 단체 군무와 타격감 있는 액션씬을 본 건 처음이었다. 2016년 초연 이후 10년 동안 11만 관객을 만나온 작품이 이번 시즌 1,000석 대극장으로 확장하면서 그 모든 에너지가 한꺼번에 터진 느낌이랄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에 인권이라는 주제, 당연하게 생각했던 '평범한 하루'의 감사함, 한 인간이 국가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들고 극장을 나왔다. 10주년을 맞아 'THE LAST'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공연이, 마지막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줬다. 앞으로도 한국 창작 뮤지컬에 이런 작품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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