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능이 끝나고, 그 뒤에 오는 것들에 대하여. – 성적표의 김민영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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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수능이 끝났다. 먼저 고된 나날들을 보냈을 수험생들에게 따스한 다독임을 보낸다. 수능이 끝나면,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마치 멈추었던 각자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라도 시작한 것처럼.
특히 많은 관계가 달라진다. 한때 같은 기숙사 방을 쓰고, 함께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이 학교와 수험생이라는 신분을 떠나, 서로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여기 우리 모두가 공감할, 관계와 성장을 따스하고 유쾌하게 짚어내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성적표의 김민영>(2021), 연출: 이재은, 임지선, 출연: 김주아, 윤아정 외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삼행시 클럽’의 회원 정희, 민영, 수산나는 수능과 졸업 이후, 각자의 스무 살을 맞이하게 된다. 수산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민영도 고향인 청주를 떠나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정희는 고향에 남아 테니스장 알바를 시작했다. 수능 시험장에서 정희에게 시계를 빌렸던 앞자리 소년이자 테니스장 사장의 아들, 정일은 재수를 한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우리들’의 관계는 어째서 이토록 짧은 시간에 흔들리는 걸까?
미국으로 간 수산나는 몸과 함께 마음도 멀어진 정희와 민영에게 서운함을 토로하고, 재개했던 삼행시 클럽의 온라인 활동도 중단하고 만다. 대학에서 새 친구들을 사귄 민영은 그들과의 대학 생활에 열중하는 듯, 연락도 잘되지 않는다. 청주에 남은 정희는 우연한 계기들로 정일과 새로운 우정을 만들어 나가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민영은 편입 준비를 하느라 서울의 오빠 집에 있다며 불쑥 정희를 집으로 초대하고, 그렇게 민영과 정희의 삐걱거리는 하루가 시작된다.
오랜만에 본 친구는 어색하기만 하다. 고등학교 때와 사뭇 달라진 모습과 나를 대하는 태도. 민영은 자신과 함께 할 것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정희를 살갑게 맞이하긴커녕 면박을 주고,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본다.
정희가 파일 틈에서 꺼내 건네는 종이 한 장 <김민영이 쏘아 올린 작은 공>. ‘햇반으로 경단 만들기’, ‘고무 동력기 5분 동안 날리기’, ‘백 텀블링 하기’… 고등학교 시절 정희와 민영이 다음에 꼭 해보기로 약속했던 엉뚱한 것들이 빼곡히 적힌 리스트였다. 정희는 리스트 속 함께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 민영이는 그저 성적표를 확인한 뒤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고, 정희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편입 이유를 묻는 정희에게 ‘마음 떴어. 진실한 사람이 없어. 가식. 완전 <한국인들> 밖에 없어.’라고 답하는 민영. 뒤이어 민영은 정희에게 계속 청주에 있을 거냐며, ‘너는 뭘 찾겠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지금 방식대로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되묻는다.
엉뚱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던 우리였는데, 어느 때부터 친구는 내 이야기에서 '현실'을 찾고 있다.
‘미안. 교수님이랑 말이 안 통해서 대구 감. 동기 집에서 자고, 일찍 해결 보고 최대한 빨리 올 게 ㅜㅜ 진짜 미안 ㅠ 무서워서 말 못 하고 감’ 한참 노트북만 들여다보던 민영은 정희가 씻는 사이 메모 한 장만을 남긴 채 떠난다. 내내 서운한 맘이었던 정희는 민영이 떠난 민영의 방을 둘러보다 그곳에서 민영의 숨은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극의 초반과 중반에서 우리는 정희에게 이입해 민영에게서 서운함을 느낀다. 오랜만에 만나 내게 냉소적인 친구. 민영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역행하는 민영의 일기장을 기점으로 우리는 비로소 민영의 진심을 이해하게 된다.
조금 죄스러운 마음으로 무릎 꿇고 주기도문을 외운 뒤 민영의 일기장을 살펴보게 된 정희. 민영이 사실 가장 바라던 꿈은 아이돌 가수. 노력과 열정을 들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없었던 것을 하려 애썼다며 포기를 결심했다. 괜찮은 척했지만 새로 사귄 동기들과도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수능, 디데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의 기록. ‘백 텀블링 하는 법. 핵심은 과감함!’ 그리고 정희를 두고 하는 말. ‘가끔 이 친구의 상상력이 못 견디게 부럽다. 내가 효용이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정희는 다음날에도 오지 않는 민영의 방을 치우고, 민영이 절대로 먹지 말라던 푸딩을 먹는 소심한 복수를 한 뒤, 햇반으로 만든 경단과 한 장의 종이를 남긴 채 집을 나온다.
<김민영의 성적표>
- 경제력 A+
- 사회성 B+
- 인간관계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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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삶 F
“네가 한국인에 대해서 얘기했던 게 생각나.
남의 눈치를 보고 안정된 삶을 쫒는 사람들?
바쁜 일상, 좁은 땅.
인맥, 가식과 형식.
알 수 없는 불안.
기다림.
두려움.
막연한 기대.
네가 나에 대해서 얘기했던 게 맞을 수도 있어.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기다림?
음, 그래도
앞으로 뭘 하든 그때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한심하다고 덜 절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넌 한국인이 아니라 혼혈이었으면 해.
그런 의미에서 에프를 줄게.”
*
수능이 끝나고, 그 뒤에 오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꽤 낯설지도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랑과 우정을 시작하는 스무 살,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진 채 다시금 시도하는 스무 살, 아직 때를 기다리는 스무 살, 실은 간절했던 꿈을 뒤로 한 채 괜찮은 척하는 스무 살.
지금 막 또 하나의 큰 산을 넘은 나의 친구들에게, 어떤 모습의 그대라도 괜찮다.
그래도 무엇을 하든, 우리가 기억하는 그때 그 시절 속 우리 같았으면 좋겠다.
[신지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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