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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사랑 방식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상대를 자유롭게 두는 것이 사랑이라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상대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이끌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종종 관계 솔루션에 등장하는 개리 채프먼의 사랑의 언어 5가지도 이러한 맥락이다.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고 느끼는 언어의 순위가 모두 달라서, 제아무리 나의 언어로 사랑을 이야기해도 그것이 상대의 언어와 다르다면 그에게는 사랑이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어나 죽기까지 절대 타인의 시선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의 경험에만 비추어 생각하게 되는 한 인간으로써 역지사지는 당연하게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나에게 좋은 것이 너에게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나도 모르게 강요한다. 인간관계에서 늘 갈등과 잡음이 들려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꼭 서로와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떠한 관계에서도 우리들은 우리의 관점에서 좋은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우리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 현대에 와서는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기 머쓱할 정도로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지구에 머무는 한 자연과 인간을 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 또한 앞서 말한 사랑의 언어처럼 모두 제각각 이다. 아마 대다수는 무관심과 양심의 가책을 동반한 미묘한 관심 사이를 오락가락 할테고, 그 중 소수가 적극적 개발(혹은 파괴) 그리고 적극적 보호를 목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나 역시 무관심과 관심 사이를 아슬아슬 외줄타기 하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설거지를 할 때 천연 수세미를 쓴다거나 종종 플라스틱이 나오지 않는 샴푸바를 사용하는 등의 노력을 하긴 하지만, 더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고 나의 편리함을 위해 흐린 눈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자연을 생각한다해도 우리들이 아주 먼 과거의 생활양식대로 살아가지 않는 한 완벽히 자연을 배려한 행동만을 하며 살 수는 없다. 일상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연으로 들어갈 때는 어떨까? 얼마 전 모리셔스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인도양에 위치한 모리셔스에는 일명 ‘웨일투어’라고 불리며 배를 타고 고래를 보러 바다로 나가는 투어가 있었다. 찾아보니 내가 방문했을 때는 향유고래를 볼 수 있는 시즌이었고, 평소 자연과 동물이라면 눈이 반짝이는 나는 그 투어를 당연히 선택하게 되었다. 웨일투어에 대해 찾다 보니 여러 정보를 얻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건 절대 고래와 함께 수영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고래의 스트레스를 방지하고자 법적으로 고래의 옆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 위에서 고래를 관찰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고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고래가 정말 그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국가에서 그렇게 법을 정해놓은 것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여러 전문가의 의견 등), 난 그것을 당연히 따르면 되는 일이다. 지구상의 생명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고래와 함께 하는 수영을 경험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좋아한다고 그들도 나의 방문이 달가울리는 없고, 나는 대자연과의 조우가 벅차 오를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그저 매일 반복되는 스트레스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얌전히 눈으로 구경하고 와야겠다 생각하며 배에 올랐다. 문제는 그 배에 함께 탄 어떤 프랑스인 노부부였는데,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고래와 함께 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모르고 온 듯 했다. 우리가 탄 배는 법을 철저히 지키며 고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였는데, 다른 몇몇 배들은 고래 가까이에 다가가고 사람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고래 주변을 수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노부부는 왜 우리는 수영할 수 없냐며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투어의 직원이 제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그들은 이미 빈정이 상한 뒤였다.


그 순간 나의 취미 중 하나인 탐조가 떠올랐다. 탐조를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플레이백’이라는 행동이다. 흔히 버드콜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새를 부르기 위해 녹음된 울음소리를 인위적으로 트는 행위이다. 원칙적으로는 전문가들의 연구같은 꼭 필요한 상황에 제한적으로 허용이 되는 일이다. 문제는 탐조를 다니는 일반인들이 무분별하게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행위를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 왜? 라고 답하며 뒤돌아보는 정도를 상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새들은 그 짧은 찰나에도 인위적으로 재생된 동족 혹은 천적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떤 방식으로든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것이 심해지면 그 장소는 안전하지 못하다 여겨 떠날 수도 있고, 그것은 생태계 교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의 두 상황에서 참 모순적이라 생각한 것은, 아마 해당 행동을 한 사람들 대부분 본인이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라는 점이다. 휴양지에 와서 굳이 먼 바다까지 고래를 보러 나오는 사람이나, 취미로 새를 보러 다니는 사람이나, 분명 자연에 관심이 많고 어느 정도 애정하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다고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가 좋았다고 결과까지 옳을 수는 없다. 스토킹이 범죄인 것처럼, 그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을 끄집어내서 사랑한다고 말한들 그것을 옳다고 할 수 없다. 조금 다른 예이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자들이 사자에 쫓기는 가젤이 불쌍하다고 개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젤이 불쌍하다는 것은 철저히 인간의 관점일 뿐, 가젤도 사자도 살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인간의 사랑과 연민으로 감히 생태계에 개입하면 안된다.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며 벅차 오르는 나에 심취해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것 또한 안된다. 물론 나 또한 나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완전무결하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점을 인지하며 늘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다면 실수들을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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