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션 발표 후, 수줍어하는 이브 생 로랑을 밀어내는 피에르 베르제>, 1986.01., Photo by 압바스/매그넘 Abbas/magnum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속 번뜩이는 눈빛의 디자이너? 두꺼운 안경을 쓰고 정장을 빼 입은 흑백 사진의 남자?
이러한 이미지 이전에 나는 멋들어진 로고, 세련된 레디 투 웨어 Ready to wear와 오트 꾸뛰르 컬렉션 Haute Couture을 먼저 떠올렸다. 혜성처럼 등장해 패션계의 어린 왕자로 불린 남자가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는 훌륭한 방증일까. 이 책을 접하기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브랜드로서 그를 기억할 뿐, 이브의 내밀한 삶과 관계, 철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게 될 그의 영원한 동반자, 피에르 베르제 Pierre Bergé에 대해서도 말이다.
피에르 베르제를 이브 생 로랑의 영원한 동반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를 표현하는 가장 진부한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를 이브 생 로랑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동성 연인 정도로 얄팍하게 알고 있었다. 2021년 부산 문화회관에서 열렸던 <매그넘 인 파리 Magnum in Paris> 전시였다. 1986년 컬렉션 발표 후, 수줍어하는 이브 생 로랑과 그런 그를 카메라와 화려한 조명 앞으로 밀어내는 베르제의 손길을 포착한 작품이었다. 벌써 4년 전이지만 당시에도 왠지 이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을 잘 알지 못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환한 스포트라이트와 소란한 장내 속 주저하는 시대적 아이콘을 향한 강하지만 애정 어린 손길이 이 사진을 완성하는 포인트였던 걸 느꼈던 것 같다.
우연한 기회로 접하게 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Lettres à Yves>(프란츠)는 얼굴도 모른 채 손 하나로 각인되었던 베르제에 대해 알게 되는 기회로 다가왔다.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Lettres à Yves>, 피에르 베르제 Pierre Bergé 지음, 김유진 옮김
이 책은 2008년 6월 1일 생 로랑의 죽음 이후, 베르제가 반 세기동안 함께했던 그들의 삶을 복기하는 1년여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인의 장례식에서 낭독했던 추도문으로 시작해, 이듬해 1주기 추도문으로 끝맺어진다. 나는 부칠 수 없는 한 움큼의 편지에 담긴 사랑의 크기, 그리고 그 사랑의 방식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로 남게 될 겁니다. 세기의 앞선 절반에는 샤넬의 이름이, 이후 절반에는 당신의 것이 있겠지요. 당신을 기다리는 기념비의 이름 아래 나는 “프랑스의 디자이너”라고 새기길 바랐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수식어로 불려왔는지! 당신은 잔향이 오래도록 울려 퍼질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인, 그것이 아니고는 도통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었지요. 프랑스적인 것, 롱샤르의 시구같은 것, 르노트르의 화단, 라벨의 음악 한 구절, 마티스가 그린 한 폭의 그림 같은 것.”
이제 나는 베르제를 실체 없는 서포터가 아닌, 이브 생 로랑이라는 사랑하는 연인 그 자체인 브랜드를 시대적 아이콘으로 ‘완성’하고자 했던, 그 누구보다 뛰어났던 예술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2009년 2월, 베르제는 그가 생 로랑과 함께 1970년부터 2008년까지 수집했던 700여 점이 넘는 미술 작품과 가구, 장식품으로 3일 간 경매를 진행한다. 파리 그랑 팔레에서 크리스티와 베르제 – 생 로랑 재단이 공동으로 주관한 해당 경매는 ‘세기의 경매 Auction of the century’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유럽 사상 가장 비싼 개인 경매로 기록되었고, 여러 작품이 당대 경매 최고가를 갱신하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러한 뜨거운 관심 아래, 생 로랑은 사후에도 그의 이름이 내걸린 경매로 하여금 뛰어난 안목과 재능의 예술가로 기억된다. 베르제는 이 서간문으로 경매를 준비하는 과정과 그 후기를 자세히 남겼다. 그는 그의 이브에게 모든 감사와 원인과 결과를 돌렸다.
이브 생 로랑과 마티스 Henri Matisse의 <뻐꾸기들, 푸른색과 장밋빛 카펫 Les coucous, tapis bleu et rose>(2011).
“사실은, 서로에게 건넨 가장 큰 사랑의 증거가 바로 이 컬렉션과 집이 아닐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언젠가 너는 말했지. “사람들은 노아유 집안의 안목에 대해 말하듯 베르제의 심미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될 거야.” 나는 무척 놀랐어. 사실 너는 좀처럼 칭찬하는 법이 없는 데다, 보통은 주인공을 자처하길 좋아했으니까. 가장 자주 그 자리를 내어준 사람이 나였고 말이야. 그런 식으로 우리는 시작부터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을 분담했지. 너는 천재였고, 나는 너와 함께하는 방법을 알았어. 우리가 함께 모아온 이 소장품들 덕분에 나는, 랭보식으로 표현하자면 ‘불을 훔친 사람들’ 곁에 머물 수 있었지. 그거 알아? 네가 이 창조라는 범죄행위에 나를 끌어들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고마움을 표해도 충분치 않으리라는 걸.”
위 사진의 앙리 마티스의 <뻐꾸기들, 푸른색과 장밋빛 카펫>은 해당 경매에서 최고가를 갱신했다. 생 로랑이 커피를 즐겨 마시곤 했던 그 의자 위쪽에 걸려있던, 바로 그 마티스의 콜라주다.
베르제의 경매는 그들 서사의 종료이자 해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억을 보존하는 예술사적 행보의 서막이었다. “샹젤리제 거리에 내걸린 빛나는 자신의 이름”을 사랑했던 연인을 애도하고 기념하는 최고의 방식인 동시에 사적인 유산을 공공의 미술사로 재분배하여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의식적인 큐레이션. 그 속에서 베르제는 이 모든 퍼포먼스를 기획한 예술가였다.
“창작은 먼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그 다음은 본질과의, 그리고 모두와의 싸움이야. 영감을 기다리는 평화로운 천재라는 것을 나는 믿지 않아. 진짜들은 순교자에 가깝지. 패션은 예술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네가 바로 이런 순교자의 삶을 살아왔다는 걸 증언할 수 있어. 너의 삶 전체가 공포와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보들레르에게 그랬듯 설령 그 혹독했던 몇 년이 너의 창작에 있어서 만큼은 가장 순조로운 시기였다 해도 말이야. 어떻게 그 컬렉션을 잊을 수 있겠어. … 그야말로 미친, 숭고한 컬렉션이었지. 그해 넌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고백하자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베르제는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옆에서 지켜보며, 누구보다 생 로랑이 예술가이자 브랜드이며 시대의 유산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자기 파괴적이고 신경질적이었던 말년의 생 로랑을, 그가 천재성과 재능을 꽃피웠던 시절의 대가로 오는 고통을 자신이 감수해야 할 몫으로서 오롯이 감내했다.
그리고 생 로랑 사후, 그는 2017년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경매와 기념 전시, 파리와 마라케시의 미술관 설립 (Museé Yves Saint Laurent), 다큐멘터리 후원은 물론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도 세상에 내보이며 생 로랑과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이자 브랜드 그 자체로 마무리했다. 철저한 예술 기획자다운 미학적, 문화-정치적 행보였다.
이 오피니언은 생 로랑과 베르제의 관계를 그저 비즈니스, 혹은 상업 전략의 일환으로 치부해버리는 냉소적인 글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베르제가 행보로서 보인 완벽한 답으로 귀결된다.
“이 편지에는 단 한 가지 목표가 있었지. 우리의 삶을 결산하는 것. 네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 요컨대 네게도 수없이 이야기했던 나의 추억에 불을 밝히는 것. 너와 함께해서, 그리고 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보여주는 것. 그리고 바라건대, 이 글이 너의 재능, 너의 취향, 너의 명민함, 너의 다정함, 너의 부드러움, 너의 힘, 너의 용기, 너의 순수함, 너의 아름다움, 너의 시선, 너의 청렴함, 너의 정직성, 너의 고집과 욕구를 보여주기를. 너를 걸을 수 없게 했던 그 ‘거인의 날개’를.”
때로 우리는 브랜딩 Branding을 그저 하나의 상업화 전략으로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피에르 베르제는 명확한 철학과 입장으로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슴에 가장 가까운 감정과 생각이 결국 브랜드를 움직이는 키이며, 예술이 정체성과 공공성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베르제-생 로랑 재단의 회장에 역임하고 있던 그는 2012년, 생 로랑의 새로운 디렉터 에디 슬리만 Hedi Slimane의 대대적인 리브랜딩 제안에도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라는 연인의 정체성과 브랜드의 본질을 공고히 하는 새로운 로고라고 이야기하며. 그렇게 생 로랑의 양성성, 그리고 오트 꾸뛰르의 언어로 레디 투 웨어의 사회를 말하는 급진성을 담아낸 리브랜딩이 완성되었다. 그의 동력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샤넬이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너는 그들에게 권력을 되찾아주었어. … 네가 그랬지. 옷이 부유한 여성들의 전유물로 남게 된다면 패션은 지루해질 거라고. 결국 기성복을 발명해냈고 말이야. 그야말로 패션사의 혁명이었어. 브라보, 무슈 생 로랑.”
이처럼 베르제는 생 로랑이 여성복에 정장 바지를 도입하고, 기성복이라는 개념을 확산했다는 점에서, 그를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닌'미학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지형에 영향을 끼친 예술가'로 보았으며, 같은 관점에서 브랜드의 문화-정치적 역할을 이야기했다. 이는 곧 그가 일부 수익을 에이즈 연구 기금에 기부한 것,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수집작품들을 유수의 미술관에 기증한 것 등, 생 로랑과의 예술적 유산을 보다 직접적으로 공공에 환원했던 것까지도 이어진다. 그는 브랜드가 가지는 공공성과 정체성을 누구보다 명확히 이해했던 주체적 예술가이자 사업가였다.
이야기를 마치며, 나는 앞선 나의 견해를 전복하고 싶다. 피에르 베르제를 ‘이브 생 로랑의 영원한 동반자’라고 부르는 것은, 베르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켰던 수식어이자, 사랑 그 자체로 브랜딩 했던 그에게 바치는 찬사이다. 브랜드 생 로랑을 완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들, 삶과 사업, 예술의 동반자. 그들에게 있어 이는 동어반복일지도 모르겠다. 생 로랑과 베르제가 함께 했던 반 세기의 삶이 곧 사업의 경영이자 예술의 창조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