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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클레이페이스, 사람은 어디까지 말랑해져야 할까 [영화]

누구든 될 수 있지만, 누구도 되지 못하는

by 서지민 에디터
2026.11.0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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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랑한 두개골


       

      고모가 사촌 오빠를 낳았을 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머리가 너무 커서 의사 선생님이 잡아당겨 꺼내야 했는데, 그때 머리가 길쭉하게 늘어났다가 다시 동그랗게 돌아갔다고 한다. 갓 태어난 아기는 두개골이 말랑말랑해서 모양이 쉽게 바뀌기 때문에 눕히는 방향도 자주 바꿔줘야 한다고 했다. 아기들은 말랑해서 쉽게 찌그러지지만 그만큼 잘 다치지 않고, 유연한 것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늙을수록 머리뼈만이 아니라 생각도, 고집도, 사랑하는 방식도 굳어가서, 갈수록 상대에게 맞추기가 어렵고 나에게 맞는 상대를 찾기도 어려워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변화를 무릅쓰는 일이다. 상대에게 맞춰 조금씩 모양이 바뀌고, 원래는 하지 않던 말을 하게 되고, 몰랐던 것을 좋아하게 되면서 굳어 있던 곳이 조금씩 말랑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까지 바뀌어야 하는 걸까. 얼마나 말랑해져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고, 얼마나 말랑해지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걸까. '클레이페이스'는 바로 이 질문을 건드린다.

       

       

       

      천의 얼굴,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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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사랑은 대사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라는 맷의 대사로 시작한다. 배우는 천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주물럭대고 그 위에 상처를 그려 넣는 그의 얼굴은 하나의 도화지이고, 그리고 그의 전부다. 고담의 뒷골목에서 자라 오스카 후보에까지 오른 그에게 얼굴은 일이자 이름이자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였다. 그런데 하룻밤의 실수로, 갱단 보스의 연인과 밤을 보낸 대가로 그는 그 얼굴을 난도질당하고, 누군가가 그려주던 가짜 상처 대신 지워지지 않는 진짜 상처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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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을 잃은 그는 과학자 케이틀린을 찾아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내 얼굴을 돌려달라고 매달린다. 후원이 끊겨 연구가 무너진 그녀는 그를 살리는 것으로 자신의 연구도 살리려 하지만, 나노 기술로 얼굴을 되돌리려던 치료는 그를 전혀 다른 존재로 바꿔놓는다. 그는 이제 몸도, 얼굴도, 목소리도 원하는 대로 빚을 수 있는, 그래서 누구의 얼굴이든 될 수 있는 진흙 같은 몸이 된다. 남의 손에 그려지던 도화지였던 얼굴이 이제는 스스로 아무렇게나 주물럭댈 수 있는 점토가 되었다.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는, 배우의 속성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오랜만에 신선한 DC 영화가 나왔다고 느낀 건, 이 영화가 단순한 빌런의 탄생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자아가 어떻게 무너지고, 어디에 기대어 버티다가, 결국 어디까지 녹아내리는지를 끝까지 따라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판도라를 빚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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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화에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의 명령을 받아 흙을 빚어 최초의 여자 판도라를 만든다. 신들은 저마다 그녀에게 아름다움과 말솜씨와 매력을 하나씩 선물했고, 판도라는 그렇게 남의 손으로 빚어지고 남의 손으로 채워진 존재로 세상에 내려왔다. 맷에게 케이틀린은 그런 헤파이스토스다. 그녀는 무너진 얼굴의 남자를 진흙으로 다시 빚어낸 사람이고, 그는 그녀의 손끝에서 새로 태어난 판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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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 점토는 아직 단단히 구워지지 않았다. 증오가 차오를 때마다 그의 얼굴은 무너져 내리는데, 그 모습은 마치 너무 뜨거운 가마에 들어간 도자기가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가 깨지거나 흘러내려 버리는 것 같다. 감정이 너무 뜨거워지면 그는 사람의 모양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 그를 다시 사람의 모양으로 붙잡아주는 건 그를 처음 빚었던 케이틀린의 손이고, 그래서 그녀와 닿을 때마다 흘러내리던 그의 얼굴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얼굴이 전부였던 사람에게, 이제 그 얼굴을 지켜주는 건 자신을 빚은 한 사람의 손이 된 셈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말랑한 머리를 자주 돌려 눕히듯, 말랑한 것은 누군가 만져줘야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건 분명 다정한 일이지만, 그 모양을 유지하는 힘이 오직 자신을 빚은 사람에게서만 온다면 그건 동시에 아주 위태로운 일이기도 하다. 도자기는 한 번 가마를 떠나 단단히 구워지고 나면 더 이상 누구의 손 없이도 제 형태를 지킨다. 그런데 빚은 손을 떠나는 순간 제 모양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아직 다 구워지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는 뜻이고, 그런 존재는 온전하게 혼자 설 수 없다.

       

       

       

      판도라의 상자


       

      맷은 점점 케이틀린에게 자기를 통째로 맡긴다. 자신의 모양도, 자신의 안정도, 자신이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까지도. 그런데 나에 대한 주도권을 누군가에게 완전히 넘긴다는 건 받는 사람에게도 병이 된다. 한 사람의 형태를 혼자서 붙잡고 있어야 하는 무게를 견디지 못한 케이틀린은 점점 그를 끔찍해하고, 그녀가 밀어낼수록 그는 더 매달리면서 의존은 결국 집착이 된다. 케이틀린은 그에게 최고의 복수는 자신의 삶을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를 망가뜨린 사람들을 쫓는 대신, 다시 빚어진 얼굴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라고. 하지만 그 말은 그에게 닿지 않는다. 자기 삶을 잘 산다는 건 결국 자기 모양을 스스로 붙잡고 서 있을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그에게는 붙잡을 자기 모양이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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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도라에게는 열지 말라는 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끝내 그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온갖 재앙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맷은 자기 안의 분노라는 항아리를 닫지 못한다. 그는 자기를 망가뜨린 사람들을 찾아가 하나씩 복수하며, 케이틀린의 약혼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진짜 약혼자를 죽인 뒤 그의 얼굴을 훔치려 한다. 그녀가 자기를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녀가 붙잡아줄 수밖에 없는 얼굴이 되면 된다는 단순하고 폭력적인 논리로, 그는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가장 끝의 답을 내놓는다.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상대의 취향에 맞춰 말투를 바꾸고 옷을 바꾸는 것에서 한참을 더 나아가, 아예 상대가 사랑하던 얼굴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받는 사랑은 과연 그의 것일까. 케이틀린이 그 얼굴을 보고 웃는다면, 그 웃음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훔친 얼굴을 향한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남의 얼굴을 쓸수록 사랑받는 자리에서 그는 점점 사라진다.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그대로 베끼는 기술이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지금, 이 설정은 꽤나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화면 속 얼굴은 진짜처럼 웃고 진짜처럼 말하지만, 그 얼굴 뒤에 진짜 사람은 없다. 기술은 그의 상처를 고쳐준 게 아니라 상처 난 얼굴 위에 아무 얼굴이나 덮어씌울 수 있게 해줬을 뿐이고, 그는 그 얼굴 아래서 자기가 지워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그 사람이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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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자아와 사랑의 다양한 메타포를 활용하는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복수도 변신도 아닌, 맷이 잠든 장면이다. 케이틀린이 잠든 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그의 몸은 천천히 그녀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잠든 채로 그녀가 된 그는 그 손으로 그녀를 어루만진다.

       

      그 장면은 정말 에로틱하다. 의식이 없는 동안 꿈 속에서 몸이 먼저 사랑하는 사람의 모양을 기억해내고, 그 모양으로 그녀를 만지면서, 자기를 사랑하듯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하듯 자기를 사랑한다. 빚어진 것이 빚은 손의 모양을 그대로 닮아 그 손을 다시 쓰다듬는 순간, 누가 누구를 만지는 건지 경계가 흐려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간다는 말을 신체화하는 그의 모습은, 도입부의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그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말랑한 사람의 사랑.

       

      하지만 그 설렘 아래에는 이미 무서운 것이 깔려 있다. 그는 그녀를 만지기 위해 그녀가 되었고, 상대에게 닿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상대가 되는 것이라는 건 개인의 경계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면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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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클럽에 잠입한 그가 춤을 추며 그곳의 모두를 속이는 장면은 통쾌하다. 그는 자유자재로 남의 얼굴을 입고 남의 몸짓을 흉내 내며,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한가운데서 마음껏 춤을 추며 살인을 저지른다. 얼굴을 잃고 숨어 살던 사람이 누구의 얼굴이든 될 수 있게 된 순간, 그는 천의 얼굴이라는 배우의 극치를 보여준다. 우리가 스크린 앞에서 감탄하는 연기라는 것이, 사실은 이렇게 남이 되어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는 일이라는 걸 그는 온몸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오면 다시 자기 얼굴로 돌아오는 배우와 달리, 그에게는 돌아갈 원래 얼굴이 없다.

       

      진흙은 잘리지 않는다. 칼을 대도 다시 붙고 찢어져도 다시 뭉치는 몸이 되면서, 얼굴을 난도질당해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람은 이제 어떤 상처도 남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상처받지 않는 인간을 여전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친다는 건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아프기 때문에 조심하고, 다칠까 봐 망설이고, 내가 아파봤기 때문에 남이 아플 것도 안다. 자기 얼굴에 커터칼을 대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난도질할 수 있는 그에게서, 남에게는 그러지 않을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상처가 남지 않는다는 건 경계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어서, 그에게는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남인지, 어디까지가 해도 되는 일이고 어디부터가 하면 안 되는 일인지 가를 선이 더 이상 없다.

       

      케이틀린의 약혼자를 죽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케이틀린에게 자신의 존재를 끝낼 스위치를 누르라고 한다. 자기 모양을 붙잡을 힘을 오래전에 그녀에게 넘겨버린 그에게는, 이제 스스로를 끝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자신에 대한 주권을 통째로 내준 사람은, 멈추는 일마저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빚었던 그 손에게 자기를 끝내 달라고 부탁한다. 스스로는 더 이상 멈출 수 없다는 걸, 이 말랑한 몸이 어디까지 번져갈지 자기도 모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빚어진 판도라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항아리를 열어버린 손을 빚은 이에게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진흙으로 빚은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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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라진 줄 알았던 그는 하수구 깊은 곳에 흘러 들어가 살아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케이틀린과 재회해 로맨틱한 대화를 나눈다. 그를 끝내 버리지 못한 그녀가 그를 찾아 내려온 것처럼,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케이틀린은 진짜가 아니다. 그가 진흙으로 빚어낸 환상이다.

       

      빚어졌던 판도라가 이제는 자기를 빚은 헤파이스토스를 거꾸로 빚어낸다. 잠결에 그녀의 모습이 되어 그녀를 어루만지던 사랑이, 이제는 그녀 자체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는 사랑이 된다. 진짜 케이틀린이 곁에 없어도, 그는 자기 안에서 그녀를 만들어 자기를 사랑하게 할 수 있다. 영화는 이 장면을 일부러 클림트의 '키스'를 닮게 연출한다. 그림 속 연인들이 하나의 금빛 옷자락에 감싸여 어디까지가 너이고 어디부터가 나인지 알 수 없게 녹아들어 있듯, 하수구 속 두 사람도 진흙 하나로 뭉쳐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클림트의 연인은 둘이 하나가 되는 황홀이었다면, 이곳의 연인은 하나가 둘인 척하는 고독이다. 처음부터 그 안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안에 품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내 안에서 지어내는 것은, 물렁물렁한 몸 안에서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판도라의 항아리 맨 밑바닥에는 희망 하나가 남았다고 하는데, 클레이페이스의 몸 맨 밑바닥에 남은 건 그가 직접 빚어낸 케이틀린의 환상이다. 자아가 너무 물컹해진 나머지 결국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로 지어낸다.

       

       

       

      다칠 수 있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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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죽이고,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를 무너뜨린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기는 쉽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빼앗긴 사람이었고, 얼굴 말고는 가진 게 없던 사람이었으며, 자신을 빚은 손에 닿아야만 사람의 모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더 이상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고 그 손에 자기를 끝내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끝내 그 손을 놓지 못하고 하수구 밑바닥에서 그 손을 다시 빚어냈다면, 그 욕망은 괴물의 것이라기보다 너무 사람의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수록 말랑해진다. 하지만 사랑이 사랑이려면 말랑해지는 와중에도 뼈 하나는 남아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맞춰 모양을 바꾸면서도 상대가 없을 때 내 모양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는 단단한 한 곳, 그리고 다칠 수 있는 몸 말이다. 사촌 오빠의 머리가 길쭉하게 늘어났다가도 다시 동그랗게 돌아온 것처럼, 말랑하다는 건 아무 모양이나 된다는 뜻이 아니라 늘어났다가도 제 모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클레이페이스는 끝까지 그 모양을 찾지 못했기에 누구든 될 수 있었지만 끝내 누구도 되지 못했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자기 안에서 지어낸 채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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