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삶은 무엇을 위한 면접인가 - 연극 '플리백' [공연]

연극 '플리백'에 대한 개인적 단상

by 문경란 에디터
2026.08.05 11:38

1. 웃는 걸까, 우는 걸까 : 트라우마가 만든, '관종'의 무대



플리백_김히어라_공연사진 (1).jpg

 

 

조명이 들어오고, 무대 가운데 딱딱하게 경직되어 앉아 있는 인물 뒤에 거대한 화면으로 창백한 얼굴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어딘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면접관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상의를 들어올려 기습적으로 속옷을 보이고, 이에 당황한 면접관이 이를 저지하며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에 연극의 막이 오른다. 극은 주인공 1인의 독백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인물은 화면 너머로 말을 걸며 수시로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한다.


그녀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관종'같이도 보인다. 극 내내 노골적인 농담과 제스처를 취하며 자신의 성적 욕구에 상당히 충실한 행태들을 보이고, 충동적이고 위태로운 결정들로 인해 그녀의 삶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지속적으로 웃음과 호응을 유도하는 지점들에서, 마냥 시원하게 웃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며 극의 중반까지 인물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였다. 극 초반에 기니피그 카페의 동업자이자 오랜 친구였던 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간신히 웃으며 털어놓는 부분을 보며, 쉬이 알기 어려운 그녀만의 불안함과 위태로움이 아끼던 친구를 잃은 과거의 트라우마 속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이러한 일차원적인 추측은 인물의 감정이 극히 고조되는 극 후반부로 달려가며 완전히 반전된다. 그녀와 친구 부 사이에 있던 전사가 드러나며,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유가 그저 '애도'의 감정이 아닌 '죄책감'의 감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자신의 과거 과오로 인한 결과가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존재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것이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지금껏 그녀를 괴롭혀 왔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이 서서히 드러나며, 왜 그녀의 표정이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것만 같이 보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극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해학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스탠딩 코미디보다 '구조신호'에 가깝다. 자신의 '젊은 여성의 몸'으로 여러 남성의 관심을 유도하려는 성적으로 충동적인 행동들이, 사실 타인의 관심과 보살핌을 갈구하는 은밀한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다.

 

 

 

2. '강박'과 '주체성'의 충돌 : 페미니즘과 페티시즘


 

플리백_김히어라_공연사진 (6).jpg

 

 

극이 진행되는 내내 페미니즘적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주인공과 언니가 페미니즘 강의를 들었던 일화에서는 이 측면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며,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인물들을 해석하는 냉소적인 언행들이 보여진다. 주인공의 발칙하고 파격적인 욕망과 속내가 기존의 여성상과 대비되며 여성상의 전형성을 부정한다. 한편, 그녀는 아주 주체적인 동시에 파괴적인데, 이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이상적인 페미니즘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그녀는 솔직하고 대담한 동시에 현실의 욕망과 결핍 속에서 여러 불안과 압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데, 이러한 내적 압박이 때론 강하게 표출되며 자신의 신체를 성적 대상이나 도구로 전락시키는 행태로 변질된다. 이를 '자기 대상화(페티시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부의 사망 사건으로 인한 죄책감과 트라우마, 언니와 아버지 등의 가까운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신뢰받지 못했다는 좌절의 경험에 대한 방어기제로 자기 대상화를 택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과 성적 충동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인물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인물의 입체적인 설정과 양가적인 행태를 통해, 우리는 '왜곡된 주체성'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사실 '체험'하는 것이 아닌 '체현' 내지 '자각'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거대한 내적 충돌이 극의 주인공 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에게만 한정되어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만의 강박으로 인해 '자아'를 부정하고 동시에 과하게 수용하려는 모순적인 행동들을 일상에서 반복할 것이다. 극의 제목이 <플리백>인 것과 같이 자신의 삶과 존재를 '플리백', 즉 '지저분하고 엉망진창인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자기혐오가 마치 유행인 것처럼 침투한 시대에, 이러한 극이 쓰여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대한 다소 피상적으로 보이는 현대 사회의 보장과 인정들이 완고해지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주도해 나가야 한다는 주체성 확립에 대한 욕구가 증폭되었다. 동시에 타인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시선에서 자신이 온전하고 결함 없이 비춰져야 한다는 강박에 매몰되기 쉽다. 이러한 '관심 결핍', '인정 강박', '완벽주의' 등의 세태들은 어찌 보면 이 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자기 대상화' 경향과도 유사하게 바라볼 수 있다. 결국 이 자기 대상화와 인정 강박이 가장 적나라하게 폭발하는 장소가 바로 '면접'이라는 제도적 공간이다. 그러한 점에서 극은 자기 객체화를 탈피하고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과 고통의 여정을 담는데, 이조차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하고 의문들을 극을 바라보는 대중에게 전가하며, 이러한 현대인의 비극에 대한 현재 진행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지점에 있어서는 특정 대상들에 한정되지 않고 많은 동시대의 존재들이 이 극으로 공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 마무리하며 : 삶은 무엇을 위한 면접인가


 

플리백_김히어라_공연사진 (14).jpg

 

 

극의 시작과 끝은 수미상관의 구조로 닿는다. 극의 후반부, 인물의 감정이 고조되는 클라이맥스에서의 흥분이 한풀 꺾이고 나면, 주인공은 다시 면접을 위해 무대 중앙의 의자에 착석하고, 화면은 그녀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극 초반, 면접관과의 언쟁이 고조된 지점을 마무리에서 이어받으며 그 이후의 상황을 그려낸다. 다만 초반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면접관이 그녀의 서사와 사연에 감화되어 유사한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토로하며 그녀에게 공감을 표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태도의 전환은 관객의 시선과도 공명한다. 초반의 면접 장면을 보며 주인공을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인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 남겨두는 반면,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는 감정의 역사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가며 인물에 대한 '재판단'의 과정을 거친다.


결국 '면접'이라는 것은 타인을 위해, 외부 세계에 '나'를 선보이기 위해 시작되는 연극에 가깝다. 인물이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며 벌인 자기파괴적 양상들은 동시대의 이면을 비춘다. 이러한 형식적인 삶의 굴레 속에서 심리적 압박과 정신적 강박에 대한 표출이 그저 '무기력'과 '유별남'과 같은 비정상성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자기 대상화 역시, 이러한 무기력의 또 다른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며 과거 탐독하였던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라는 저서를 회상하였다. 그는 현대인의 무기력과 같은 정신 질환들이 '남이 바라는 나'로 살아가는 '가짜 자아'로 인해 심화됨과 동시에, 심지어는 사회가 질병을 정의하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 자체로도 부정당한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강박과 질병을 자각하고, 이로부터 자아를 해방시키는 방법 중 하나로 '진짜'와 '허울'을 구분하는 자기인식을 꼽는다. 대상에 대한 판단과 검열이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극도로 긴장하며 면접을 볼 때, 자신을 포장하고 부정적인 부분을 남몰래 숨기는 것처럼 독자적 판단을 통한 '자기 검열'은 일상적으로도 발생한다.


이러한 검열이 생산하는 자아의 허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들은 우리를 구원해 줄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다. 주인공의 과오 중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행태들은 단순 저질스럽고 저속하다 보기에도 어렵다. 그 행태 또한 그녀일 것이고, 그것이 그 자아의 한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앉게 되는 면접 의자처럼, 우리 역시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재평가한다. 다만 그 앞에서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표정을 애써 숨기기보다는, 과도한 자기 검열을 잠시 멈추고 그동안 방어막으로 삼았던 허울들을 날것 그대로 직시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