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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빗소리는 어떻게 빗소리가 될까 -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국내 1호 음성해설 작가 서수연이 건네는 장면들

by 임예영 에디터
2026.07.16 12:59

 

 

“컵에 보드카를 따른다.”

    

이 짧은 문장이 없으면, 누군가에게는 컵도 보드카도 없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분명 잔을 들고 술을 따랐을 것이다. 객석의 누군가는 그 동작을 보며 다음 감정을 따라갔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장면이 어떻게 도착할까. 컵에 액체가 닿는 소리만으로는 그것이 물인지 술인지 알 수 없다. 배우의 침묵이 망설임인지 결심인지도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서수연의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그 비어 있는 장면 사이에 놓이는 문장에 관한 책이다. 음성해설, 시각장애인에게 보이지 않는 장면을 귀로 들려주는 일.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 일이 이렇게 급박한 자리에서 이뤄지는지 몰랐다. 대사와 대사 사이, 숨과 숨 사이, 장면이 지나가버리기 전의 몇 초. 그 짧은 틈에 세계 하나가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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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 세계를 말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닿는 방식 자체를 책의 바깥에서도 고민한다. 표지를 만져보면 제목과 부제 아래에 점자가 있다. 손끝으로 짚을 수 있는 작은 돌기들이 놓여 있다. 양장본도 아닌데 가름끈이 달려 있다는 것도 눈에 들어온다. 책을 만든 이들이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 했는지, 그 작은 장치들에서 먼저 전해진다.


내용과 형식이 같은 곳을 바라볼 때 생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음성해설에 관한 책이, 누군가에게 책이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까지 고려할 때. 이때 표지의 점자도, 가름끈은 장식의 의미를 넘어선다. 책이 하려던 말은 책의 몸에도 남는다.

 

 

 

무대 뒤에서 시작된 문장


 

책은 2024년 3월 21일 저녁, 국립정동극장 대극장 무대 뒤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무대감독의 신호를 기다린다. 배우가 아니라 해설자로서 무대에 나가기 위해서다. 검은색 바지에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무대로 나서고, 객석 우측에 마련된 1인용 책상 앞에 앉아 마이크를 쥔다.


배우가 “2099년”이라고 말하면, 작가는 “우주선”이라고 말한다. 배우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라고 말하면 “재윤과 윤경이 서로에게 다가가 포옹한다”고 해설한다. 문장은 짧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짧은 문장이 없으면 장면 전체가 비어버릴 수 있다. 배우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누가 무엇을 집어 드는지, 어떤 몸짓이 대사 사이를 지나가는지. 보이는 사람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지나쳐버리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작품을 따라가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가 된다.


해설은 객석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배우들도 그 말을 듣는다. 해설을 듣고 “아, 맞다!” 하며 다음 행동을 떠올리기도 한다. 음성해설은 완성된 공연에 덧붙인 설명이 아니라, 함께 움직이는 리듬이 된다. 대사 사이에 들어간 문장이 관객에게는 장면을 열고, 배우에게는 작은 신호가 된다. 커튼콜에도 해설은 이어진다. “함께 춤을 춥니다!” 곧이어 배우들이 외친다. “음성해설, 서수연!” 작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한 뒤 무대로 오른다. 이 책은 음성해설을 정의하기 전에 그 일이 놓인 자리를 먼저 펼쳐 보인다. 무대 뒤의 긴장, 신호를 기다리는 몸, 몇 초짜리 틈을 재는 감각, 말이 장면이 되는 순간. 음성해설은 그렇게 우리 앞에 등장한다.

 

 

 

대사 사이의 좁은 자리


 

서수연은 국내 1호 음성해설 작가다. 2003년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음성해설을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연극, 뮤지컬, 전시를 비롯한 수천 편의 작품에 음성해설을 써왔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직업인의 에세이이면서, 한국에서 음성해설이라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만들어왔는지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음성해설이라는 말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말은 ‘화면해설’일지도 모른다. 들어본 적은 있어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쓰이고 전달되는지까지 생각해본 적은 많지 않다. 모르는 분야를 다룬 책을 읽을 때는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몰랐다는 사실이 늦게 드러나는 기분. 그래도 어떤 책은 그 늦음을 탓하지 않고 문을 열어준다. 이 책이 그랬다.

 

음성해설은 시각장애인에게 보이지 않는 장면을 귀로 들려주는 일이다. 자막은 청각장애인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눈으로 보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나누면 간단해 보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일이 얼마나 좁은 자리에서 이루어지는지 알게 된다. 작품에는 이미 대사가 있다. 음악도 있고, 효과음도 있고, 침묵도 있다. 음성해설은 그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대사와 대사 사이, 숨과 숨 사이, 장면이 지나가버리기 전의 짧은 틈. 그 안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들고 있는지, 표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넣어야 한다.


너무 많이 말하면 작품을 덮어버리고, 너무 적게 말하면 장면이 사라진다. 정확해야 하지만 딱딱해서만은 안 된다. 감정을 전해야 하지만 감상을 대신 써버려서도 안 된다. 결국 음성해설은 설명문이 아니라 선택의 문장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 무엇이 없으면 장면이 무너지는가.


저자가 화면해설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마주한 감각은 그런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드라마를 보다가,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지글지글 삼겹살 굽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소리를 귀로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소리는 눈으로 확인된다. 화면에 비가 내리니 빗소리로 듣고, 컵이 보이니 액체가 따라지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보이는 정보가 사라지면, 소리는 갑자기 다른 장면을 불러올 수 있다.


음성해설은 그 어긋남을 줄이는 일이다. 빗소리가 빗소리로 도착하도록, 컵에 따른 것이 물인지 보드카인지 알 수 있도록, 누군가의 침묵이 망설임인지 분노인지 슬픔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길을 놓는 일.

 

 

 

어려운 화면을 건네는 일


 

저자는 화려한 시각 효과, 빠른 편집, 독특한 카메라 움직임이 특징인 「CSI」 시리즈의 화면해설에도 참여했다. 보이는 정보를 말로 옮기기 전에 이미 다음 장면이 와버릴 것 같은 작품이다. 어려운 화면이라는 이유로 건네지 않아도 되는 세계는 없다. 시각장애인 관객에게도 수사물이 필요하고, 액션이 필요하고, 빠르고 복잡한 장면이 필요하다. 음성해설이 쉬운 작품에만 머문다면, 접근 가능한 세계도 그만큼 좁아진다.


책에는 실제 음성해설 대본도 실려 있다. 어떤 장면을 어떤 말로 압축했는지, 어떤 정보가 선택되고 어떤 정보가 빠졌는지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가장 필요한 것을 골라야 한다. 친절함은 때로 냉정한 선택 위에서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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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음성 해설이나 자막을 켜고 영화를 보던 경험이 떠올랐다. 한국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때면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여러 소리가 겹치는 장면에서는 금세 지쳤다. 대사를 놓치고, 놓친 대사를 추측하다 다음 장면을 놓쳤다.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기분이 들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서 같은 영화를 자막과 함께 봤을 때는 전혀 달랐다. 대사가 눈에 들어오자 장면이 선명해졌다. 어떤 자막에는 행동이나 소리 정보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음악이 바뀌는 순간. 분명 보고 들었다고 생각한 장면 속에서도 놓친 것이 많았다. 물론 음성해설이나 자막 같은 접근성 서비스는 비장애인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그 말이 지원의 가장 큰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유용하다는 설명은 편리하지만, 어떤 권리가 다수의 편익을 증명해야만 인정받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음성해설은 비장애인에게도 쓸모가 있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공연과 영화와 드라마와 전시를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자막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편리한 기능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작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다. 문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게다가 그 문은 좋은 마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과 기술, 판단과 연습, 이 일을 계속해나가는 사람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다.

 

 

 

어떤 문장은 하나의 장면이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음성해설에 관한 책이면서, 보이지 않는 노동에 관한 책이다. 공연이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대개 작품 자체를 본다. 배우, 연출, 음악, 조명, 무대, 카메라 정도는 떠올릴 수 있다. 그 작품을 누군가에게 도착시키기 위해 다시 쓰고, 읽고, 조율하는 사람은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음성해설은 작품과 관객 사이에 놓인 또 하나의 창작이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작품을 가로막지 않으면서 누군가의 감상 속으로 들어간다. 잘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 작품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작품 안팎을 계속 오가는 일. 책의 제목은 그래서 정확하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다. 시각장애인이 음성해설을 통해 장면을 본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노동과 감각의 세계가 이 책을 통해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장면은 문장을 통해 열린다. 어떤 소리는 자막을 통해 선명해진다. 어떤 공연은 해설이 있을 때 비로소 함께 나눌 수 있는 사건이 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음성해설은 더 이상 작품 바깥의 설명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작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통로다. 보이지 않는 장면을 건네는 일.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을 보이게 하는 일.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시간을 보여준다.

 

어떤 문장은 누군가에게 하나의 장면이다. 그 문장이 닿는 순간, 보이지 않던 세계는 조금은 다른 길로, 그러나 분명히 함께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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