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집에 잠시 머물기를 청했다. 나는 바닥에서, 그는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혼곤하게 잠에 빠져들다가 그가 나를 흔들어 깨우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혀 있었고, 친구의 어깨에도 가시가 박혀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친구의 손을 잡기 위해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갔고 우리는 손을 잡고 벽에 등을 기대 앉았다. 나는 끝말잇기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청춘! 춘.. 춘곤증. 증오? 오해. 해명. 명.. 명 뭐있지. 명절! 절망으로 할게. 망. 망원경? 경찰. 찰떡. 떡볶이? 이, 이… 이별. 별거. 거지! 지각? 각성.. 성..성공. 허무. 무.. 무궁화. 화? 화투.
두 판을 했고 나는 첫 판을 지고 두 번째 판은 이겼다. 우리는 끝말잇기가 끝나자 다시 잠을 청했다. 새벽 세 시였고, 한 시간 동안 두 판을 했다.
그 밤에는 무슨 꿈을 꾸었던가. 이번에도 내가 성급하게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나왔던가? 그 사람이 나를 떠나고 나는 이번에도 미로같은, 어둡고 차가운 건물 안에서 길을 헤매었던가. 어쨌거나 다시 아침이 왔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동쪽에서 해가 뜨는 아침에만 죽음을 생각한다. 빌라 뒤 쓰레기통 옆에 아주 작은 참새가 뒤집어져 죽어 있었다. 작은 초파리 한 마리가 그의 곁을 빙빙 돌았다. 나는 어째야 할 지 모르는 황망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성호를 잠시 긋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해서.
끝말잇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내비게이션이 없고 종이로 펼치던 전국 지도로 가족 여행을 하던 때, 아빠의 은색 LPG 차 안에서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하던 끝말잇기. 무등산을 힘겹게 등산할 때 발 밑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집중하며 한 걸음을 오를 때의 끝말잇기. 그리고 서로의 몸에 가시가 박힌 채로 시작한 끝말잇기.
이런 끝말잇기는 어떤가.
기대는 늘 배신을 낳고, 고독은 배달비를 낳고, 매몰비용은 월급을 갉아먹고, 월급은 통장을 스쳐가고, 가난은 사람을 철들게 하고, 철은 녹슬고, 슬픔은 술을 부르고, 술은 실수를 부르고, 수습은 내 몫이고, 내 손에 떨어지는 몫은 별로 없고, 없던 일로 하기엔 기억력이 너무 좋고, 나 혼자 좋아했던 사람은 떠나고, 슬픈 고양이는 나를 무시하고,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데, 대체 나는 언제쯤 강해지는 건지 모르겠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나만의 낙원은 내게 오기도 전에 길을 잃었나 보다. 로 끝나는 끝말잇기라면.
이번에는 이런 끝말잇기는 어떤가.
하루가 끝나면 또 다른 하루를 준비해야 하는 끝말잇기. 침대에 누워서 이불 안에 나를 숨기고 오늘 내가 무엇을 적절하게 해내지 못했는지 검열하는 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파열음. 그 파열음에 이어 새벽에 나의 몸을 괴롭게 만드는 오늘의 계획들. 그 계획들에 이어 시작되는 내 맘대로 하나 되는 것 없는 하루들로 끝나는 끝말잇기. 처음과 끝을 이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엉킨 실타래로 끝나버리는 잇기와 끊기.
누군가를 구할 생각일랑 하지 말고 오늘은 너 자신이나 구하라고 속삭이는 신의 음성으로 시작하는 하루의 끊기. 구슬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는 저녁의 잇기. 내가 먼저 첫 번째 단어를 말할 테니, 네가 그 다음 단어를 이어 줘. 나는 숨죽여 단어를 고른다.
오늘의 단어는, “나뭇잎”. 너는 고민하겠지.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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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별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그런데 이 행위에 ‘끝말잇기’라는 이름을 붙여보니, 괜히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네요. 혼자서는 도무지 이 질긴 생각들을 끊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때마다 나트륨처럼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단어를 하나 마련해두는 것도 좋겠어요.
한별님 글을 통해 제 안에서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잠시 끊어내고 머리를 환기할 수 있는 방법을 엿보고 갑니다. 적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우리가 끝말잇기라는 게임을 하는 이유가 뭘까 막연히 생각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영화를 보러갔는데, ‘보고 있을 땐 영화 전개가 왜 이렇게 뜬금없고, 논리적이지 않고 또 불분명하고 난해하기까지 하지?’라고 불만을 가지다가 갑자기 ‘어, 사실 매일 살아가고 있는 내 생각도, 내 삶도 그렇지 않나’라고 소름돋은 순간이 있었어요.
유명한 상업 영화를 보면 전개가 말끔하고 인물의 생각과 가치관 같은 것들을 제3자인 관객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사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 삶과 자신의 가치관 같음 것들이 그렇지 않고 매일 흔들린다는 걸 발견했을 때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
서두가 길었지만, 결론을 내려보면 우리 인생도 끝말잇기처럼 느닷없고 갑자기 확 다른 데로 튀어도 괜찮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뭇잎 받고 허용 법칙을 살려, (절기가 많이 지나긴 했지만) ‘입춘’을 떠올려 봅니다. 점점 느껴지는 가을의 정취가 쓸쓸하긴 하지만 그 다가오는 선선함이 좋게 느껴져서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의 소재를 정할때 저도 사실 제 일상의 순간들에 대해 혼자서 생각해보고, 거기에 덧붙여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한별 에디터님께서 끝말잇기에서 생각을 잇고 이어 얻은 통찰을 보면서 마치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아 좋았어요. 또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하루를 끝내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이어가는 자책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했습니다. 저도 저만의 끝말잇기로 조금 고통받고 있었는데, 한별 에디터님의 글을 읽으면서 게임을 끊어가는 계기가 되었어요.
끝말잇기를 하다보면 앞뒤 맥락이란 상관없이 전혀 다른 말로 튀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뭇잎' 다음 '잎새'로 이어지는 것 처럼 매끄럽게 이어지기도 하지요. 한별 에디터님의 글을 읽고 제가 느낀 감정들이 저의 일상과 앞으로의 글들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