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독파(獨波)로 독파(獨破)하다 - 수림뉴웨이브 독파

현대음악가 유홍이 보여주고자 한 대금의 매력
글 입력 2024.03.2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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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은 낯설다. 이유는 접할 일이 없어서다.

 

국악기는 더더욱 낯설다. 이유는 접할 일이 더더욱 없어서다.

 

국악기 중에서 그나마 친근한 걸 고르라면 단연코 단소다. 학창시절 고사리같은 손으로 단소의 구멍을 막으려 애쓰던 기억이 선명하다. 불기가 너무 어려워 얼마나 고생했던지. 당시 기억 때문에 '국악기는 어려운 것'이라는 편견이 생겨버렸다.

 

단소를 장농 위로 치워버린 뒤로 국악기는 내게서 잽싸게 멀어져갔다. 사실상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셈이다.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로 국악기에 관심이 생겼다. '비익련리'를 들으면서부터다.

 

'비익련리'는 드라마 <추노>의 OST로 해금과 피아노가 함께 연주한다. 누군가 내게 '비애'라는 단어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면, 난 아무말 않고 비익련리를 들려줄테다. 음악을 들은 한 명의 누리꾼은 '가요는 나를 위로해주지만 사극노래는 나와 함께 운다'고 말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서양악기가 나를 위로해준다면, 국악기는 나와 함께 운다'고 해석하고 싶다. 한민족의 정서는 '한'이라는데, 그 한을 구구절절 대변할 수 있는 건 국악기 뿐인 것 같다.

 

해금의 비익련리를 들어본 후 다른 국악기로 연주하는 비익련리도 찾아봤다. 누군가가 대금으로 비익련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해금이 펑펑 우는 느낌이라면, 대금은 슬픔을 억누르고 꾹꾹 눌러 담았지만 마지못해 울분이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감정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 국악기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동시에 대금의 매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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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대금 연주회를 발견했을 때 살짝 설렜던 건 그 때문이다. 당시의 그 향수를 다시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날 진하게 흔들어놓고 간 대금의 음색에 다시 한번 취하고 싶었다.

 

정말 취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시(子時)



첫 곡을 듣자마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음을 느꼈다.

 

연주자가 없는 공연이라니. 대금을 볼 수 없는 공연이라니.

 

분명 어디선가 소리는 들리는데 연주자가 보이지 않는다. 연주자가 보이지 않으니 시각이 붕 뜬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난 무얼 '봐야'하지?

 

이윽고 공연자의 발이 스크린 뒤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 발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없을 모양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밤, 자시(子時)에 공기를 가르는 대금의 소리를 귀로만 의지한 채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대금은 슬픈 감정만을 토해내는 악기가 아니었다. 들숨 날숨을 쉬는 하나의 생명이었다. 생명의 태동을 눈에 앞서 귀로 먼저 전해듣는다. 꽤 괜찮은 길보다.

  

 

 

Today I Wrote Nothing Vol. 1


  

모습을 드러낸 대금 연주자 유홍은 같은 마디만을 집요하게 반복하는 독특한 곡을 선보인다. 다만 같은 반복이어도 동일한 음색으로 연주하지 않는다. 앞부분을 길게 늘이기도 하고 뒷부분을 끊기도 하며 파도치듯 높낮이를 조절하기도 한다.

 

아주 쉬운 곡으로 비유하자면 캐논 변주곡이다. 반복의 주기가 아주 짧은 한 마디로 압축된 캐논 변주곡. 변주를 주는 건 알겠는데 모호한 지점에서 끊어 묘한 불쾌가 느껴진다.

 

불쾌의 기저는 혼돈이다. 음악이 붕괴되는 현장이다. 듣기 편하게 설정된 하나의 구성을 음표 단위로 잘게 분해해 재배치한다. 재배치된 걸 다시 분해해 재배치한다. 분해, 재배치, 분해, 재배치, 분해, 재배치...

 

우리는 이제 흘러가는 선율이 아니라 호흡과 행동에 집중하게 된다. '자시(子時)'가 눈을 가렸다면 'Today I Wrote Nothing Vol. 1'은 귀를 가린다. 덕분에 유홍 연주자의 격정적인 입술의 교차, 긴장을 고조시키는 호흡, 다리의 흔들림, 팔의 자유분방함 등에 집중한다. 대금의 형태도 더욱 또렷이 들어온다. 겨우 닿을 듯 멀리 뻗어있는 긴 몸, 유홍 연주자의 신호에 맞춰 공명하는 관에 눈길이 간다.

 

길게 펼쳐진 악보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유홍 연주자는 중력에 몸을 맡겨 아래로 내려갈 운명을 지닌 모래와 같다. 모래의 여정이 끝나는 걸 모래보다 먼저 아는 이는 그걸 지켜보는 우리다. 유홍 연주자의 여정이 끝나는 걸 그보다 먼저 아는 이는 우리 관람자다.

 

기나긴 혼돈의 끝을 지켜보는 우리는 전지자가 된다.

 

 

 

BAI


  

유홍 연주자는 일본 전통 악기 샤미센을 연주하는 혼조 히데지로와 BAI를 연주한다. 각기 다른 민족의 전통악기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을 연주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것을 같게, 같은 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예술의 주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살아숨쉬는 현장을 눈을 목격한다는 건, 인생에 있어 크나큰 행복 중 하나다.

 

다만 혼조 히데지로는 현장에 없다. 스크린 속의 영상에서 유홍 연주자와 함께한다. 코로나19를 지나는 동안 해당 방식의 연주를 채택했다고 하는데, 또 다른 합주의 형태를 보는 것 같아 신선했다.

 

혼조 히데지로는 유홍을 볼 수 없지만 유홍은 혼조 히데지로를 볼 수 있다. 유홍은 연주 도중 혼조 히데지로의 손짓과 몸짓을 유심히 지켜본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전 연주까지 우리가 유홍을 지켜볼 때와 유사하다. 우리는 유홍의 동작을, 유홍은 혼조 히데지로의 동작을 세심히 읽어낸다. 

 

 

 

즉흥연주 / 이너스케이프(Innerscape) 초연


  

이번 공연의 핵심은 바로 이 즉흥연주다. 첼로 연주자 지박과 함께 사전에 전혀 합의하지 않은 음악을 연주한다. 심지어 두 사람의 합주는 이번이 처음이다. 즉흥연주가 시작된 순간부터 그 어떤 해석도 유효하지 않다. 유홍과 지박은 맹렬한 기세로 순간순간의 감정과 감각, 영감을 토해낸다. 이따금씩 눈을 맞추며 무언의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 둘은 즉흥합주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곡을 연주한다. 

 

이후 유홍은 즉흥으로 연주했던 곡 중 잊혀지지 않던 선율로 완성한 '이너스케이프'를 이번 <수림뉴웨이브 독파>에서 초연한다. 독특한 순간이었다. '즉흥' 연주곡의 산물을 '초연'한다니. 모순된 두 가지를 한번에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제 우리는 유홍과 대금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온전히 느낀다. 모든 감각 기관을 활용해 유홍의 발자취를 훑는다. 

 

발자취가 마냥 선명하진 않다. 오히려 따라가면 갈수록 흐려진다. 사라진다. 두리번두리번거리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로 그를 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다만 그것은 그가 영영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부러' 사라진다. 틀에 잡힌 질서에서 벗어나 혼돈으로 나아가고 정해진 경계와 틀을 깨부순다. 그는 홀로 만들어낸 흐름으로 한계와 상황을 파괴한다. 독파(獨波)로 독파(獨破)한다.


이것이 바로 유홍이 가고자 했던 길,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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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공연의 제목은 왜 이너스케이프인가요?

 

예술가들의 내적 고민과 연구들은 현대 음악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이에 집중하는 시간도 상당히 길어요. 제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연주한다는 의미에서 이너스케이프로 지었습니다.

 

우리들이 현대음악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저는 하나의 주제를 깊게 고민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예술로 풀어내는 과정에 매력을 느끼는데요, 제가 추천드리고 싶은 건 현대음악에서 예술가들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저런 음악을 만들었는지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걸 본 후에 내 마음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내 생각은 어떤지까지 나아간다면 더욱더 좋을 것 같아요.

 

 

언제나 홀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과한 매력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무의식적으로 빠져들기에 기어코 어떻게 빠지게 됐는지를 떠올려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혼란을 끌어내고 마침내 혼돈으로 인도한다. 두려울 것을 알지만 그렇기에 다가간다.  달콤한 과실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한 입 베어물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언제나 날 취하게 한다. 현대예술가들은 언제나 날 취하게 만든다. 

 

현대음악가 유홍은 나를 홀렸다. 대금에 취하고 싶어 대금 연주회를 왔는데 유홍에 취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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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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