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서울의 ‘살아남은 장소’가 들려준 이야기 - ‘서울 건축 여행’ 김예슬 작가

글 입력 2024.04.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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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살아남은 장소'가 들려준 이야기

『서울 건축 여행』 김예슬 작가

 

 

서울을 돌아다니며 가장 자주 마주치는 풍경은 공사현장이 아닐까. 리모델링과 재건축의 연속인 이 도시에서는 어제 갔던 가게가 한 달 뒤, 반년 뒤에도 그 모습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도시는 머물기 위한 곳이라기보다 재빨리 목표를 달성하고 떠나야 하는 곳으로 다가온다. 먹고사는 일만 해결된다면 서울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하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여기에도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은’ 건물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김예슬 작가는 2015년부터 약 10년간 서울을 돌아다니며 1000곳이 넘는 오래된 건물을 여행했고, 그중 54곳을 뽑아 『서울 건축 여행』으로 엮었다. 그가 방문한 건물은 대부분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역동적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조용한 증인이다. 그곳에 남겨진 이야기를 듣고 거기 살았던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서울은 김예슬 작가에게 색다른 도시가 되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기"(451쪽) 때문이다. 지난 9일, 김예슬 작가를 만나 그가 바라본 서울이란 어떤 곳인지 들을 수 있었다.

 

 

 

10년간 서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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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했던 장소에 관해 좀 더 정보를 찾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번 여행지가 정해지곤 했습니다."

 

 

오랜 여정이 책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여행인가요?

 

서울로 출퇴근하는 게 지칠 무렵, 문득 여행으로 서울에 오는 사람들이 부럽더군요. 그러다 문득 나도 여행자처럼 서울을 다녀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주말에 시간을 내어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죠. 이왕 간 거 인증샷을 남기고 싶어 SNS에 그날의 여행을 간략히 기록하기 시작했고요. 그렇게 2년 정도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다니다 보니 제 여정을 ‘건축’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근현대사 건축물을 찾아다녔습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셨을 때는 정보가 많지 않았을 텐데, 어떤 기준으로 목적지를 정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주말에 시간을 내어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자는 마음이었기에 궁궐부터 시작해 독립서점, 오래된 영화관 등 제가 궁금한 곳 위주로 갔어요. 그렇게 방문했던 장소에 관해 좀 더 정보를 찾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번 여행지가 정해지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광주 여행을 갔다가 우일선 선교사 사택을 방문한 다음, 관련된 걸 찾아보다가 서울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식이죠.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 415명이 잠들어 있는 이곳을 다녀오면 또 일제강점기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살았던 집 중에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 있는지 궁금해져서 찾아보고, 다음번엔 거기에 가는 거예요.

 

 

수많은 곳을 다녀오셨을 텐데, 서울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축물은 무엇이었나요?


김중업 건축가의 ‘썬프라자’를 꼽고 싶어요. 1982년에 쇼핑몰을 염두에 두고 지어진 건축물로 지금도 일부는 여전히 쇼핑몰로 사용되고 있지요.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의 예술작품이면서 현대 사람들의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녹아 있다는 게 재미있어요. 이 건물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김중업 건축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나선형 계단이에요. 이런 계단 형태는 김중업 건축가의 다른 건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썬프라자의 계단은 규모가 유독 커서 그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은 서울 건축 여행 코스를 추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가족 나들이나 데이트라면 건국대와 어린이대공원을 같이 다녀오시는 걸 추천드려요. 어린이대공원이 원래 골프장이었고, 이곳에 있는 꿈마루 건물도 여러 건축가의 손을 거쳤다는 걸 생각하며 걸으면 유원지라고만 생각했던 이곳이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바로 옆에 있는 건국대에 들르면 김중업 건축가의 흔적을 살펴보세요. 지금은 언어교육원으로 사용되는 구 도서관 건물이 김중업 건축가의 작품입니다.

 

걷는 걸 좋아한다면 최만린미술관과 정릉골 코스가 좋습니다. 최만린미술관을 관람한 다음 박경리 작가의 집터까지 걸어가 보세요. 지도 앱으로는 12분 거리라고 나오는데, 그 길대로 가기보다 최대한 많이 헤매면서 가시기를 추천드려요. 성북구의 옛 모습을 느껴보실 수 있거든요.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동네이기에 더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거예요.

 

 

 

여행자의 눈으로 서울을 바라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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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도 ‘여행자의 눈’으로 질문을 던지면

얻을 수 있는 보물이 있습니다."

 


건축물을 보다 보면 언젠가 그곳에 있었을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울의 건축을 탐구하며 새롭게 알게 된, 또는 새롭게 바라보게 된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한무숙문학관에 다녀와서 이름만 알고 있었던 한무숙이라는 소설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편이 은행장이었고,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내용을 글로 접했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로 작가가 40년간 살았던 집을 개조한 문학관에 가보니 그 현장감이 어마어마했어요. 


책이 가득한 작업실과 생활감 가득한 응접실을 둘러보고 다른 문인과 나눴던 손때 묻은 편지까지 보고 나니 이 소설가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앉아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한무숙이라는 작가의 존재가 그 순간 굉장히 크게 다가왔죠. 사람의 어떤 면모는 그 사람의 사적인 공간을 방문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걸 실감했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여러 건축물을 보다 보면 자신만의 건축 취향도 생길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좋아하는 건축 스타일을 소개해 주세요.


일제강점기였던 1920~3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에 관심이 많아요. 당시 한국과 일본 건축 양식에 서양식까지 더해진 주택을 ‘문화주택’이라 불렀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화주택을 보면 들어가보고 싶어요. 일본 사람들이 지은 집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오래 사용했죠. 그래서 상황에 맞게 고쳐가며 달라진 독특한 점이 많대요. 일식, 양식, 한식이 섞인 모습도 그 때문이고요. 또 집 안에서 풍경은 어떤지, 사용자만 아는 집의 특징은 무엇인지 궁금하죠.

 

또 저는 계단을 좋아합니다. 앞서 썬프라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곡선을 사용한 김중업 선생님 특유의 나선형 계단 양식에 마음이 끌려요.

 

 

매일 출퇴근하는 도시를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쉽지 않을 듯해요. 일상적인 공간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작가님만의 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시대를 다르게 생각해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같은 풍경이지만 2024년이 아니라 100년 전이라고 상상하며 걷기 시작하면 낯설어져요. 막연하다면, 그 시대에 살았을 인물 한 명을 지정해 봐요. 그 사람이 실제로 걸었을 거리, 보았을 풍경을 상상하며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다니는 것도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질문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해외여행을 가면 사소한 것에도 질문을 많이 하잖아요. 서울을 다니면서도 그렇게 해보는 거예요. 일상에서도 ‘여행자의 눈’으로 질문을 던지면 얻을 수 있는 보물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질문이 있을까요?


요즘 저는 식당이나 카페가 된 오래된 집에 관심이 많아요. 거기에 쌓여 있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거든요. 이런 공간을 알게 되면 직접 가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확인하고, 가능하면 거기를 운영하시는 분께 질문을 드려요. 


최근에는 이솝 한남점에 갔는데, 중정이 있는 내부 구조와 건물 기둥이 특이했어요. 얼른 ‘여행자 모드’가 되어 운영자분께 공간에 관해 여쭤봤죠. 일제강점기에 주택으로 지어져 40여 년 동안 한약방으로 사용되다가 음식점이 되었고, 지금은 이솝 매장이 된 거라고 해요. 100년 가까이 된 건물이 새로운 브랜딩을 만나 핫플레이스가 된 게 재미있었어요. 이런 건물이 의외로 많을 것 같아서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싶어요.

 

 

 

서울이라는 영화에 자막을 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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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통해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도 궁금해집니다."
 

 

서울은 정말 빨리 변하는 도시인데요. 책에서 소개하지 못한, 사라져서 아쉬운 건축물이나 공간이 있을까요?


지금 생각나는 건 은평구에 있던 기자촌이에요. 군사정권 시절에 기자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김훈 작가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인과 문인이 거쳐 갔죠. 아쉽게도 지금은 재개발되면서 아파트와 터만 남아 있어요. 서울은 원래도 빠르게 변하는 도시인데, 역사적 인물이 얽혀 있지 않은 곳은 더 쉽게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책에서 소개한 곳들도 예외는 아닐 것 같습니다. 책을 쓰는 동안 사라진 곳도 있다고 들었어요.


책을 쓰며 서울의 최신 모습을 담겠다고 다짐했어요. 예전에 가본 곳도 다시 가보고, 뉴스 검색도 하면서 수정을 많이 했죠. 하지만 반년도 안 되는 시간에도 많은 게 바뀌더라고요. 망원동 구 윤진열 소아과 건물에 있던 카페 뎀셀브즈는 문을 닫았고, 구 서산부인과 건물도 페인트칠을 다시 해서 책에 실린 것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서울은 정말 따라잡기가 힘든 도시예요. 그렇기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은 정말로 ‘살아남은’ 장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서울에는 이곳에서 오래 살았어도 정 붙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은 듯해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서울이 고향일 텐데, 가끔은 서울이 진짜 고향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해요. 제가 생각하는 고향이란 언제 가도 같은 풍경이 있고, 그 풍경 안에 내 추억이 쌓여 있고, 또 갈 때마다 거기에 새로운 추억을 추가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서울이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서울이라는 신기루 안에서 사는 건 아닌지, 서울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럼 작가님에게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요? 건축 여행을 하며 어떤 생각의 변화가 생겼는지도 궁금합니다.


의정부시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으로서 서울은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었어요. 양가감정이 드는 도시였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회사생활을 하며 어떤 때는 너무 살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빠져나와야 하는 곳으로 느껴졌어요. 하지만 10년간 여행을 하다 보니 다른 모습도 많이 보여요. 요즘은 서울을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걸었던 길, 나만의 문화재가 있는 동네라고 생각하며 보물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서울의 미래도 고민할 때가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서울이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지금의 모습을 어떻게 남길 수 있을지요. 도시의 역사를 알아가며 함께 이야기해본다면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상상도 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서울 건축 여행』 독자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시작한 걸음이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해요. 공간을 통해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도 궁금해집니다. 같은 공간을 봐도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 달라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울이라는 영화에 모두 다 번역가로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 다른 경험과 말맛으로 다른 자막을 붙여보는 거죠. 


이 책을 읽고 여행에 나설 분들이 번역한 서울이 정말 궁금해요. 좋은 기회가 된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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