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름의 함정과 낙천성의 방패에 가려진 것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서]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글 입력 2024.09.1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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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아름다운 시구가 이야기하듯,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더하는 경이로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 불리우는 존재의 의사가 반영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부르는 사람의 편리와 의도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꽤 무시무시한 함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에게 이름이 불려 ‘꽃’이 된 ‘그’는 정말 꽃이 되고 싶었을까? 혹은 정말 ‘꽃’이라고 부를 정도로 다른 꽃들과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는 존재일까?


이러한 질문이 괜한 시비나 자의적인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인간의 편의에 의해 이름 붙여지고 분류된 수많은 생물들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사실 인간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름에 그들의 본질 자체를 모두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이름 붙인 수많은 생명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 이름조차 필요치 않다. 오직 인간이 생물들에게서 발견한 것만이 그들의 이름에 반영된다. 그렇기에 그 이름 속에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간의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쉽게 일종의 편향을 만들어 낸다.


일전에 비거니즘 관련 책을 읽다가 ‘물고기’의 대안용어로 ‘물살이’라는 단어를 활용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물고기’라는 이름은 인간에게 먹혀지는 살덩이로서의 의미를 과도하게 부각하여, 그것이 하나의 생명 혹은 생물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물고기’의 중세국어 어형은 ‘물(水)’ + 사잇소리 'ㅅ' + ‘고기(肉)’의 형태로 ‘물의 고기’를 의미한다. 물에 사는 동물이지만 죽기 전까지는 ‘고기’로 불리다가 죽으면 ‘생선’으로 변모한다.

 

살아 숨쉬는 동물을 ‘고기’로 부르는 종차별을 지양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fish’를 ‘어류’ 또는 ‘물살이’라고 번역하였다.

 

- 피터 싱어(전범선·홍성환 옮김), 『왜 비건인가?』 中

 

 

어느 시대에는 직관적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사용된 것이더라도, 새로운 성찰과 철학, 새로운 발견들과 함께 그것은 부자연스럽고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측면에서 ‘물고기’라는 단어가 가졌던 자연스러움도, ‘어류’라는 분류가 보장했던 명료함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룰루 밀러의 에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처럼 오랫동안 자연스럽고 공고하게 여겨져 온 이름과 분류가 만들어 낸 함정을 지적하고, 그것에 생겨난 균열을 뛰어난 필력으로 조명한다. 이를 통해 이 책은 실제로 그 균열을 넓히는 파급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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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함정에 가려진 것 :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룰루 밀러는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에 주목한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미국의 어류학자로, 수많은 ‘물고기’들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다. 그는 열정적인 탐사와 수집으로 새로운 어류 종을 발견하고, 자신과 자신의 스승의 이름을 덧붙여 만든 새로운 이름을 그들의 지느러미에 꿰매 물고기 표본을 만들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평생 생물을 관찰하고 연구했지만, 그것을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발견과 연구에서 일종의 윤리적인 가치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결국 그가 도달한 곳은 ‘우생학’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이름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또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한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투명하게 담아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어류를 넘어 다른 인간들에게까지 적용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열등함’, ‘필요 없음’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들이 그들과 같은 존재를 태어나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열중했다. 이를 위해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그가 ‘부적합자’로 이름 붙인 존재들을 납치하고 감금하는 수용소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강제적인 불임 수술을 뒷받침하고 묵인했다.


책 속에서 룰루 밀러는 꽤 최근까지 미국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혹은 ‘합법’으로 포장되어 자행된 불법 불임수술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리고 실제로 어린 시절 ‘부적합자’로 수용소에 끌려가 함께 생활한 애나와 메리를 인터뷰한다. 애나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 그 곳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임 수술을 당한다.


애나와 메리의 연대와 우정과는 별개로 그들은 삶의 많은 부분을 그 수용소로부터, 그들에게 부적합자라는 이름을 붙인 수많은 우생학자들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고 지원한 정부와 기관들로부터 빼앗겼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쩌면 애나에게 가능했을 ‘엄마’라는 이름을 생각해 봤다.


애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이름을 갖길 매우 희망했지만, 우생학 주창자들의 자의적인 ‘이름 붙이기’에 영원히 그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반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가졌던 이름은 너무나 빛나고 영광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는 그가 가진 ‘이름 붙이기’의 권력을 가지고 그가 행했던 악하고 비합리적인 것들을 지워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찬란한’ 이름은 그가 머물렀던 곳에 남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지워내려 했던 이름들은 수면 위로 조금씩 드러났고, 그가 지닌 이름 뒤에 감추어졌던 논리적·도덕적 결함도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름 붙이기’를 두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힘겨루기와 사회적·학문적 논의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룰루 밀러는 애초에 과학과 사회가 정의한 ‘이름’ 역시 고정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그저 인간이 활용하는 ‘편리한’ 도구일 뿐임을 다시 강조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이 ‘누구에게’ 편리한 것인지, 그것이 무엇을 부각하고 감추는 지 제대로 살펴야 할 것이다.


책 속에서는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인 소재로 ‘물고기’를 제시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던 그 분류조차 계통학적인 정밀함과 명확함을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부분이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직관과 편리에서 비롯된 편향을 넘지 못해 스스로 만들어낸 이름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 "맞아요. 직관에 어긋납니다!" 자칭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인 릭 윈터바텀이 내게 한 말이다. 그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기가 대적하기에 너무 센 적수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했다. 그 센 적수는 바로 직관이다. 그는 사람들이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p.244


- "어류"라는 말을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 p.251


 

룰루 밀러는 어류라는 분류 기준이 가진 모호함을 알고 난 후 ‘물고기’를 포기한 이후의 삶을 사유한다. 사실 과학에서 분류 체계의 일부가 바뀐다고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이 크게 바뀌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룰루밀러는 상징적인 또 실질적인 의미에서 ‘물고기’란 이름을 포기하는 것의 의미를 찾는다. 룰루 밀러에게 그것은 그동안 사회에서 규정지었던, 그리고 스스로 규정지었던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룰루 밀러는 그 속에서 행복과 진실에 다가가는 열쇠를 찾는다.


룰루 밀러는 다윈의 연구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한다.


 

-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p.227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이름들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얻은 이름조차 오롯이 우리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오히려 이름 뒤의 복잡성을 제대로 마주하고 자신과 스스로를 둘러싼 세계를 더욱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이를 위한 성찰과 논의를 계속할 때 진실과 행복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낙천성의 방패에 가려진 것 : 모두 중요하지만 동시에 모두 중요하지 않은 우리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고수해 온 무시무시한 편향 뒤에 ‘낙천성의 방패’가 있음을 지적한다.


 

- 데이비드의 정서적 해부도를 쫙 펼쳐놓고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원흉은 그 스스로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던 두툼한 "낙천성의 방패"가 아닌가 싶다.

데이비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쓴 루서 스피어는 그가 자기자신에게 갖는 확신과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강화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자기 길을 막는 모든 걸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그의 능력은 자신의 길이 진보로 이어질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면서 몇 배는 더 커졌다."

 

데이비드는 공개적으로는 자기기만을 그토록 공격했지만, 사적으로는,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그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던 것같다.

 

- p.202


 

그의 삶을 지탱하고 그를 ‘영웅’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낙천성의 방패’는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그가 그 자리에 부당한, 부적합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었다.


우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같이 자신에 대한 엄청난 확신과 그에 기반한 추진력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을 존경하고 닮고자 한다. 인생의 큰 시련을 맞아 답을 찾고자 했던 룰루 밀러처럼 말이다.


하지만 때로 이러한 자기확신은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기만과, 자신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치우고자 하는 위험한 착각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 이는 더 많은 권력을 영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자기확신을 기반으로 하는 추진력과 자신과 ‘타자’를 쉽게 구분하고 배척하는 명료함은 비슷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결집하는 힘을 지닌다. 또한 이는 뚜렷한 신념과 열정, 능력으로 포장되어 인물이나 집단이 지닌 매력을 높인다. 이를 통해 낙천성의 방패는 더 커진 권력을 지키는 단단한 요새가 된다.


특히 요즘과 같이 갈등과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존재의 고유함과 보편성 사이 ‘자존감’을 논하는 사회에, 이러한 낙천성의 방패는 아주 매력적인 도구로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 곁의 수많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여전히 찬란한 이름을 점유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낙천성의 방패는 너무나 쉽게 편향과 오류의 가능성과 숙의의 필요성을 지워버린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잘못되거나 모자란 생각을 할 수 있고, 때로 어떤 사안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보다 그 사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충분한 논의를 거칠 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다.

 

낙천성의 방패가 가려버린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포함한 모두가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모두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서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세계의 아주 일부만을 차지하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다.

 

 

-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리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 p.222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단단한 믿음은 아주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사회 안에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개인이 가지는 고유성과 특별함이 스스로만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 우리는 서로를 존중할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존재,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룰루 밀러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모두 중요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중요하지 않은(사소한) 존재야’라는 말을 먼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과학의 차원에서 이것은 우리가 함부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무엇이 더 필요하고 무엇이 덜 필요한지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과학은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도구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인간들의 몫이다. 이는 종교나 사회적 상식, 문화 등 때로는 ‘절대적’이라고 믿어지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는 태도이다.


이는 맹목적으로 또는 무책임하게 ‘그럴 수도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숙의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목표를 향하는 과감한 결단과 실행력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변을 살피지 않고 ‘낙천성의 방패’로만 밀고 나간 후에 도달한 곳에서는 이미 많은 것을 놓친 이후일 수 있다.

 

 

- 과학자들은 "긍정적 환상을 갖는 것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터널 시야 바깥에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 됐다. (...)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 p.267


 

우리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또 ‘낙천성의 방패’를 포기할 때 우리는 얼마나 더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사실 생물학에서 생물의 분류에 대한 기준이 바뀌는 것이 한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수많은 이름을 다시 살피는 일일 수 있으며, 성공과 실패, 중요함과 사소함 더 좋은 것과, 덜 나쁜 것을 구분하는 여러 기준을 다시 마주하는 일일 수도 있다.


또한 ‘낙천성의 방패’를 포기하는 것은 그동안 우상으로 여겨왔던 많은 인물들을 다시 보는 것이기도, 그동안 망설임 없이 내딛어왔던 자신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다시 살피는 아주 괴로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도, 우리를 둘러싼 사회도 조금씩 바꾸어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모두 사소한 존재이다. 그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겸손하고 겸허하게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존재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알아가고,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서로가 더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아주 중요하지만 동시에 사소한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이름 안에서 새로운 행복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를, 낙천성의 방패를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로 더 나은 논의와 논쟁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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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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