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 당신은 단 하나인데 나는 여럿이어서, 당신은 죄가 없고 나는 죄가 여럿인 것까지도 눈 속에 단단히 파묻고 오겠습니다.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내 마음속에서 ‘삿포로’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낭만의 도시로 깊숙이 아로새겨졌다. 가본 적도 없는 장소가 왜인지 눈앞에 절로 그려지고, 눈이 쌓인 풍경을 보면 가던 걸음이 멈춰졌다. 아니, 어쩌면 가본 적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런 막연한 로망을 꿈꿀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삿포로는 언제나 내가 그리는 꿈의 여행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2024년 2월, 마침내 나는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일본, 삿포로로.
1.
겨울의 삿포로를 방문할 때는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일정이 있다. 바로 세계 3대 축제로 꼽히는 ‘삿포로 눈축제’다. 매년 2월 초에 일주일 동안 열리는 이 축제는 일본 최대의 겨울 축제로, 1950년 삿포로의 중·고등학생들이 눈으로 만든 조각 작품 6개를 오도리 공원(大通公園)에 전시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자체로 여행 성수기인 겨울 삿포로지만 이 축제 기간엔 그야말로 극성수기가 되기 때문에 방문 전 미리 일정과 비용 계산이 필요하다. 참고로 내년엔 2026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77번째 눈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나는 24년도 눈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던 2월 11일에 삿포로에 도착했다. 치토세 공항에 내려 처음으로 마주한 삿포로는 ‘눈의 도시’라는 별칭이 전혀 놀랍지 않은, 말 그대로 새하얀 곳이었다. 크지 않은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여행을 앞둔 설렘이 공기 중에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공항버스 표를 끊어 숙소가 있는 스스키노 역까지 이동해 짐을 풀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종이 탑승권이 기분 좋은 여행의 시작을 알려왔다.
눈축제는 크게 오도리 공원에서 열리는 ‘국제 눈 조각 경연’과 스스키노 행사장에서 열리는 ‘얼음 조각 경연’, 그리고 츠도무 행사장의 ‘눈썰매·스케이트 체험’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오도리 공원을 위주로 구경했다. 경연에 참가한 일반인들의 조각상이 길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시민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한 지브리의 유바바도 있었다! 그보다 더 안쪽에는 홍보 행사를 겸하는 기업 단위의 조각들도 놓여 있었다.
오도리 공원의 유바바 눈 조각상
스스키노 행사장의 얼음 조각상
하지만 가장 대미는 무려 일 년 전 가을부터, 그것도 삿포로 시청의 지하에서 비밀리에 제작되는 높이 12~15m의 대형 눈 조각이다. 내가 방문했던 때는 애니메이션 <골든 카무이>와 협업한 거대한 조각상이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가까이 서면 고개를 한참 꺾어야 전체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한 크기였다.
2.
삿포로 근처에는 작은 항구도시 오타루가 있다. 그리고 오타루에는 그 유명한 오르골당 본관이 있다.
근처 역(주로 삿포로역이나 스스키노역)에서 기차를 타고 미나미오타루역에 내린 뒤 7분 정도 걸으면 마치 근대 성당처럼 생긴 고풍스러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골 가게이자 박물관이기도 한 이 건물의 안에는 수많은 종류의 오르골들이 진열되어 있다. 1912년에 건축된 3층짜리 목조 건물이라 안에 들어서자 묵직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들었고, 날이 저물어 외벽 조명까지 켜지자 그야말로 한 편의 동화 같은 풍경의 완성이었다.
안을 거닐며 형형색색으로 번지는 빛깔들과 다양하게 울려 퍼지는 음색들을 감상하고 있으니 어쩐지 별세계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인파는 많았지만, 높은 층에서 내려다보니 반짝이는 공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작은 인영들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 애니메이션 같아 오히려 어울리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오르골당에서 바깥으로 조금 걸어 나왔더니 오타루의 낭만을 상징하는 ‘오타루 운하’가 흐르고 있었다. 사실 오타루 방문은 원래 계획해 두었던 온천마을 일정을 취소하며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행 당시에는 이곳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두워진 밤하늘 속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물길과 그 주위를 밝히는 조명을 보았을 때, 나는 불가항력으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밤의 오타루 운하
운하를 따라 놓여 있던 작은 조명들
3.
마지막으로 내가 여행했던, 그리고 추천하고자 하는 삿포로는 ‘비에이·후라노 투어’다. 삿포로 여행을 올 시에는 많은 사람이 거의 필수 코스처럼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중심 시내에서 약간 거리가 있기 때문에 보통은 이 지역만을 위한 일일 단체 투어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국제면허증이 있고 운전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렌터카를 빌려 직접 자유로운 일정으로 다녀오는 것도 좋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운전석 방향이 반대인 데다 길에 눈과 얼음이 아주 많이 껴있기 때문에 위험도는 높은 편이다. 나는 무난하게 일일 단체 투어를 신청했다.
먼저 방문했던 곳은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크리스마스트리’였다. 드넓은 설산 위에 우뚝 서 있는 한 그루의 가문비나무. 사유지라 근처로는 접근할 수 없고 멀리서 사진만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주변 풍경은 발자국 하나 없이 아주 깨끗했다. 맑은 하늘 아래, 광활하고 새하얀 도화지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모습이 어쩐지 비현실적이라 한참을 멍하니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비에이에는 ‘탁신관’이라는 유명한 사진 갤러리가 있는데, 사실 이곳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더 알려져 있다. 5분 정도면 한 바퀴를 다 돌 정도로 작은 숲이지만 그 안으로는 흰빛 도는 길쭉한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다른 사람들과 멀어져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걷고 있으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던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 숲길의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탁신관 건물로 이어지는데, 내가 방문했던 당시엔 마에다 신조와 그의 손자인 마에다 케이 두 사람의 「COLORS OF THE SNOW」 사진전이 한창이었다. 다채로운 눈의 색을 촬영한 사진들이 벽을 따라 걸려있었고, 먼저 만났던 크리스마스트리의 사진 역시 고요하게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쪽 지역 투어의 대부분은 자연경관을 구경하는 코스인데, 그중 제일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흰 수염 폭포’를 고르겠다. 사실 폭포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름다운 자연으로 ‘청의 호수’가 있는데, 아쉽게도 나는 이곳에는 방문하지 못했다. 비에이에는 대표적인 온천인 ‘시로가네 온천’이 있는데, 흰 수염 폭포는 여기로 흘러드는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다. 거대한 절벽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새하얀 물줄기가 마치 흰 수염을 닮았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
강 위에는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올라서자 발밑으로 오묘한 색을 띠는 에메랄드빛 물줄기가 끊임없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굵은 고드름 덩어리가 마치 진짜 흰 수염처럼 보였고, 그 옆으로는 강한 추위에도 끄떡 않는 온천수가 여전히 절벽을 타고 졸졸 강줄기로 흘러들고 있었다.
상상만 하던 것을 실제로 접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위험부담이 큰 일이다. 그것이 걱정하던 일이 아니라 기대하던 일이라면 더욱. 인천공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부러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진이나 영상 속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본 삿포로는 다행히 듣던 대로 낭만적인 겨울 도시 그 자체였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 것도, 지붕 위로 지붕보다 두껍게 쌓인 눈 뭉치를 구경하는 것도, 어딜 가나 사람들이 길거리에 만들어둔 눈사람 가족을 마주치는 것도, 온 겨울이 내내 화이트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조명을 꾸며둔 것도 모두 색다른 경험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달 정도 머무르며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나 짧게 느껴졌던 3박 4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귀국했다.
곧 있으면 12월이 되고 겨울이 온다. 아무래도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두근거림, 여행의 설렘을 다시 한번 느껴볼 때가 온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