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효녀 심청 아니 그냥 소녀 심청 - 심청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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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가 날아?
공연 <심청날다>의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물론 심청이 진짜 나는 건 아니고······ 《심청가》와 이 작품을 공연하는 밴드 ‘날다(NALDA)’의 이름이 합쳐져 이러한 제목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국악 크로스오버 밴드 ‘날다’가 판소리 《심청가》의 주요 대목과 장면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 바로 <심청날다>이다.
고백하자면, 《심청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었다. 판소리와 국악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연예술은 더더욱 보러 다니지 않는 편이다 보니 시작 전까지 다소 뚱한 표정으로 관람석에 앉아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청날다>는 오프닝부터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경쾌하고 신선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심청전》의 큰 줄기는 따라가면서도 기존에 통용되던 사회적 관점이나 시선을 비틀고 변주한 방식이 몹시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두 작품 <심청날다>와 《심청전》의 주요 이야기 구조는 같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심청은 자신을 젖동냥하며 키운 아버지 심 봉사의 보살핌 아래 무럭무럭 자란다.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말에 심청은 인당수에 빠지고 그의 효심을 높이 산 용왕이 심청을 살려 이러쿵저러쿵······.
이민아가 말했듯, 《심청전》을 통해 조상들이 전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심청의 지극한 ‘효’일 것이다. 어린 심청이 아버지의 여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사하면서까지 희생을 감수하는 건 분명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나 역시 심청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고, 번번이 우와 이 언니 효심이 정말 지극한 걸, 나 같은 건 발끝도 못 따라가겠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경상도의 민요 가운데 하나인 ‘쾌지나 칭칭’을 시작으로 <심청날다>는 경쾌한 국악 소리와 함께 관객을 심청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런데 잠깐, 쾌지나 칭칭? 2017년 3월 4일, 제19차 범국민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이 노래가 조금 익숙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날 본 행사의 마무리로 열린 대동한마당에서 이 노래가 ‘터울림’ ‘자진뱃노래’ ‘아리랑’과 함께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쾌지나 칭칭 나네 / 한 손에는 촛불 들고 / 한 손에는 구호 들고”라는 가사로 시작하여 ‘아리랑’으로 이어지는 무대는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가사를 완전히 변주하여 노래하면서도 국악의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게 놀라웠다. 자, 그럼 <심청날다>가 부르는 ‘쾌지나 칭칭’의 가사를 살펴보자.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엔 희망도 많다
놀다가세 놀다나 가세 밴드날다와 놀다나 가세
여기계신 여러분들 밴드날다의 심청날다
즐겨보실 준비됐으면 다같이 소리질러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 ‘쾌지나 칭칭’ 中
국악의 매력은 재즈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건 밴드 날다의 공연을 보고 나서였다. 자유롭게, 물 흐르듯, 어떠한 이질감이나 이물감 없이 노래하고 연주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상당히 귀한 체험이라는 것을 이날의 경험으로 실감했던 것 같다. ‘쾌지나 칭칭’이 끝나고 ‘둥둥둥 내 딸’의 공연이 이어진다. 심 봉사가 어린 딸을 데리고 동냥하러 다니는 이야기. 그렇게 심청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열여섯이 되고 ‘소녀 심청’을 노래하는 심청이 등장한다. 내게 무엇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던 건 심청의 대사였다. 심청은 노래한다.
살아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강해져야 했어 조금 미쳐야 했어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효녀 아닌 그냥 소녀이고 싶어
효녀 심청 아니 그냥 소녀 심청
효녀 심청 아니 그냥 소녀 심청
사람들은 내게 착하다고 말을 하지
사람들은 나를 효녀라 부르기도 하지
사람들의 환상 지켜주려 하다
너무 어린 나이 철이 들어버린 난
- ‘소녀 심청’ 中
나는 효녀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소녀가 되고 싶었다고. 아! 이 어찌나 솔직한 고백인가! 심청의 마음을 헤아려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심청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심청전》에서 정작 심청이라는 개인이 얼마나 배제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10대 소녀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자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는 것은 분명 효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지만······ 어딘가 께름칙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심청은 열여섯에 스스로 ‘산 제물’이 된 것이고 심 봉사는 결국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도 눈을 뜨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현대인의 잣대를 들이밀며 이 작품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조선 시대 쓰인 《심청전》이 당대에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하니 고전 소설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깃들어있다고 믿는다. 현대의 우리는 세월의 풍파를 견뎌 온 선대 작품을 존중하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며 작품을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청날다>는 기존의 작품을 성공적으로 재해석한 하나의 훌륭한 사례라고 믿는다. ‘소녀 심청’의 무대를 보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상상력의 중요성이었다. 예술은 결국 상상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심청은 무엇을 좋아했을까? 하나뿐인 가족인 아빠와 갈등은 없었을까? 어떤 일상을 보냈을까? 심청에게는 사춘기가 없었을까? 심청의 취미는 무엇이었을까? 인당수에 빠질 운명에 놓인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심청날다>는 세월의 풍파를 견뎌 온 고전 소설의 너머를 본다. 기본적으로 이런 질문들은 작품을 개별 인물의 시선에서 연구하고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제작자는 그러한 인고의 시간과 노력을 거쳐 관객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상상력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작품의 깊이는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심청날다>는 그런 상상력의 재현에 도전하는 작품이다.
내가 공연을 보면서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이 공연을 보는 많은 관객이 어린이와 초등학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해당 공연이 무료라는 점 역시 의미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에게 다가갈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예술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소녀 심청’이 끝나고 ‘중 올라간다’ ‘심청날다’ ‘화초타령’ ‘방아타령’ ‘눈을뜨고’ ‘옹헤야’까지 총 9개의 무대가 차례로 등장한다. 이날 공연을 보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무대와 관객과의 소통이었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동안, 프로그램에 기재된 다양한 곡을 선보이면서도 밴드 날다는 지속해서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10대 청소년으로 어엿이 성장한 심청은 아빠와의 갈등에 직면한다. 심 봉사가 방을 치우지 않는 심청을 꾸짖자 심청은 “아빠는 신경 쓰지 말라”며 버럭 화를 내고 집을 나가버린다. 심 봉사는 관객을 돌아보며 (중2병을 맞이한) 딸을 키우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가 딸과의 갈등에 직면하여 구시렁구시렁, 관객층에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요즘 애들은 뭐 좋아해? 뭐? 마라탕? 탕후루? 써브웨이?”) 객석은 왈가닥 뒤집히고 이로써 공연은 관객과 배우를 연결하는 하나의 멋진 소통의 장이 된다.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옹헤야’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갈피를 못 잡을 때
오르막길을 오르다 힘들면 다같이 외쳐보자
옹헤야 옹헤야
- ‘옹헤야’ 中
국악이 이렇게나 신명 나는 것이었다니!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공존하고 융화할 수 있는지 <심청날다>는 놀랍도록 유려한 솜씨로 증명해 낸다. 공연이 끝나고 흥미가 생겨 밴드 날다를 검색해 보았다. ‘심청날다’의 뮤직비디오가 있다는 것 혹시 아시는지? 공연을 묵묵히 빛내준 밴드 멤버들과 《심청전》을 연기한 배우들을 다시 마주할 수 있어 기뻤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밴드 날다가 선보이는 《심청가》의 경쾌하고 신나는 연주를 스크린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윤아경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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