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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망가지고 불완전한 여성의 독백 - 연극 ‘플리백’ [공연]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플리백’이 있다

by 소인정 에디터
2026.08.0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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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 후 한 여자가 무대 위에 등장한다. 의자 하나만 놓인 단출한 무대 위에서 주인공 ‘플리백’은 90분간 자신의 인생을 거침없이, 그리고 날것 그대로 풀어놓는다.


여성 1인 극으로 진행되는 연극 ‘플리백’은 성적 농담과 파격적인 유머로 가득 찬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을 취한다. 극의 제목이자 주인공을 칭하는 ‘플리백(Fleabag)’은 영어권에서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장소’를 뜻하는 표현이다. 작품은 이 단어가 지닌 의미처럼 어딘가 망가지고 불완전한 한 여성의 내면에 주목한다.


런던의 한 골목에서 기니피그 카페를 간신히 운영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플리백은 충동과 실수의 연속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면접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상의를 벗어버리고, 성공한 언니와는 사사건건 부딪히며, 아버지는 새어머니의 눈치만 살핀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무심한 듯 보이지만, 플리백의 내면에는 친한 친구의 죽음, 가족과의 단절, 그리고 쉽게 메워지지 않는 깊은 공허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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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행동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인물의 서사는 초반에 일정한 당혹감을 안긴다. 시간 선의 흐름 없이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와 거침없는 성적 고백은 관객에게 심리적 문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자극적인 서사 속에서 자신과 판이한 인물의 삶에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순간, 후반부에서 그녀가 고작 26세에 불과한 청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관극의 시선은 급격히 전환된다.


플리백의 과시적인 자기고백에서 드러나는 행동은 성적 행위를 통해서만 애정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왜곡된 생존 방식의 투영이자, 극심한 불안과 고립에서 비롯된 자기 파괴적 방어기제다. 관객에게 웃음을 유도하며 자신의 발언을 고의로 격하시키지만, 그 이면에는 외로움과 죄책감, 상실과 자기혐오가 도사리고 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삶이 어그러졌다는 자괴감이 들 때, 타인에게 거부당하거나 하찮게 여겨지기 전에 스스로 가치를 폄하하고 희화화하는 것이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겨버리고, 광대를 자처함으로써 관객의 웃음과 관심을 갈구하는 모습은 비극성을 띤다.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존재가 이해받고 포용되기를 갈구하는 애처로운 몸부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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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백의 삶에는 순수한 애정을 제공하는 대상이 부재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린 후 딸을 외면하는 아버지와 언니는 취기에 찾아온 플리백을 냉정히 거부한다. 성적 관계가 아닌 대화와 눈빛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인물은 매일 카페를 찾는 ‘조’가 유일하다.

 

그러나 조에게조차 애정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어주려 하는 모습은, 그녀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애정을 주고받는 방식이 성적 행위가 유일했음을 암시한다. 살갗이 닿는 순간의 피상적인 안정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유일한 정서적 안식처였던 친한 친구 ‘부’마저 죽음으로 잃게 되자 그녀의 고립은 극에 달한다.


스스로 무너져 내림을 인지하면서도, 죄책감과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과 성관계에 의지하는 26세 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은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관객에게 몰입을 이끌어내는 동력은 주인공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너는 제4의 벽을 허문 구조, 그리고 그 깊은 내면의 고백으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배우의 연기력에 있다.

 

관객은 단순한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그녀의 비밀을 공유하는 ‘공범’이 된다. 이 독특한 연결감은 오직 연극 무대라는 공간이 주는 독점적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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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대 장치 없이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만으로 90분이 채워진다. 특히 소품을 극도로 최소화한 김히어라 배우 회차의 연출은 플리백의 마음속 공허한 검은 상자를 들여다보는 듯한 효과를 더한다. 극도로 미니멀한 형식 속에서 배우의 표정과 음성은 감정을 극대화하며, 관객이 인물의 삶을 밀도 있게 체화하도록 돕는다. 개인의 고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현대인이 공유하는 외로움과 결핍을 비추며 보편적인 서사로 확장된다.


‘플리백’은 누구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불안과 공허를 마주하게 한다. 류주연 연출이 "플리백의 독백은 현대인에게 해방감을, 그녀의 눈물은 깊은 공감을 전한다"라며 "이 발칙한 고백을 통해 관객이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힌 바와 같이, 누구나 삶의 한 지점에서 취업, 연애, 인간관계 등으로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경험한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관성적으로 스스로를 망쳐버리는 순간의 절망감은 우리 모두에게 유효하다.


플리백의 공허와 불안을 이해하는 순간, 관객은 언어로 다 표현되지 않은 그녀의 깊은 내면까지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파격적인 형태 속에 숨겨진 이 진솔한 고백은 결국 독특한 형태의 위로와 몰입을 선사한다.


연극 ‘플리백’은 단순한 1인 극을 넘어 웃음과 슬픔, 공감과 불편함 사이를 오가며 관객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강렬한 경험이다. 공연은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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