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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짧고 단순한 제목을 가진 양귀자의 소설 『모순』은 내게 길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급기야 졸업 기념 여행을 함께 떠난 친구들과는 여행 전 『모순』을 읽고 만나, 2박 3일 동안 끊이지 않고 일명 ‘모순 토크’를 이어갔다. 이 정도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으면 후련할 법도 한데, 집에 오고 나서도 궁금증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결말을 읽은 후 감동에 젖어 ‘작가 노트’를 미처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책에 관한 열띤 대화 후 읽은 ‘작가 노트’ 속 문구가 인상 깊었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뿐인 삶을 반성하고 사색하게 하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고.'
좋은 책은 ‘생각의 샘’ 역할을 한다. 좋은 책은 300쪽 남짓한 책 한 권을 읽은 후에 여운이 며칠은 지속되고,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만나 몇 시간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만든다. 그렇게 나눈 이야기는 쌓이고 쌓여 독자를 더 큰 소통의 장으로 이끈다. 따라서 『모순』을 읽고 내가 행한 사색을 글을 통해 몇 자 공유하고자 한다.
행복과 불행: 엄마와 이모
주인공 안진진에게는 일란성 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가 있다. 외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과거 진진의 어머니와 이모는 얼굴부터 성격, 성적까지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한 사람 같던 둘은 결혼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산다. 같은 날에 결혼해 같은 나이의 딸 하나 아들 하나를 가진 것마저 똑같지만, 둘의 삶은 행복과 불행의 극단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하고 억센 어머니와 부자이면서 부드러운 이모. 진진은 자신의 어머니를 부끄러워하고 이모를 더 애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진은 소설 속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차지하는 이모와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소유하는 엄마의 삶.’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 행복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던 이모의 삶 이면의 불행이 드러난다. 불현듯 갑자기, 이모는 자신의 삶이 ‘무덤 속처럼 평온’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무덤 속으로 향했다.
풍요와 빈곤: 나영규와 김장우
어머니와 이모의 삶이 나눠진 직접적인 계기는 ‘결혼’이다. 그렇기에 진진은 스물다섯의 한 해를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 과제에 몰두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90년대라는 점을 고려할 때, 결혼의 무게가 지금보다 묵직하게 느껴진다. 특히 어머니와 이모의 결혼 후 인생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라왔을 진진에게 결혼은 인생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큰 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어머니와 이모가 결혼한 나이를 맞이한 진진의 앞에는 상반된 매력을 지닌 나영규와 김장우의 구애가 놓여있다.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진진의 고민을 중점으로 본다면 『모순』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보다도 먼저 나온 ‘남편 찾기 게임’으로도 읽을 수 있다.
같은 남자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나영규와 김장우. 2020년대에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마법의 도구 ‘MBTI’를 적용한다면, 나영규와 김장우는 극과 극인 ‘ESTJ’와 ‘INFP’의 대명사일 것만 같다. 계획형의 끝판왕인 나영규는 데이트 스케줄을 줄줄 외울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해오고, 스케줄 내의 5분 이상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남자다. 미리 계획해온 일과를 무조건 정해진 시간 내에 지켜야 하고, 예외는 용납하지 않는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을 추구하며 유복한 나영규는 건축가인 진진의 이모부와 비슷한 면모를 지녔다.
반면 김장우는 ‘낭만파’, ‘감성파’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순수하고 수채화같은 면모를 지닌 김장우는 산과 들에 피어 있는 야생화들을 사랑하고, 희고 소박한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감동해 눈물 짓는 남자다. 만나자는 이야기도, 약속 장소도, 그 날의 데이트 코스도 진진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만 한다. 김장우는 자신의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과 유약한 면모를 진진에게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진진은 김장우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나영규와 있을 때처럼 본인의 집안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결국 진진은 이모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나영규의 인생계획서 작성에 함께하기로 선택한다.
주인공 안진진의 선택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라는 말에 진진의 선택을 수긍할 수 있었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타인의 불행도, 행복도 가늠할 수 없다. 진진은 이모와 가까웠고 어쩔 때는 이모를 어머니보다 사랑했지만, 진진은 이모의 삶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진은 이모와는 다른, 자신이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낼 것이다.
진진은 초반에 자신의 삶을 ‘지리멸렬’하다고 묘사했고, 이모는 유서에서 자신의 삶이 ‘지리멸렬’했다고 말했으며, 소설 말미에 이르러 진진은 이모의 죽음이 주리와 주혁의 삶을 완벽히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막아냈다고 언급한다.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삶을 막아내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삶이라는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죽음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는 쌍둥이로 태어났고, 그렇기에 삶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