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업무나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일 참 잘한다’라고 느껴지는 누군가가 있다. 협업하는 게 껄끄럽지 않고, 길게 인연을 가져가고 싶은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명확한 의사전달, 깔끔한 일정 정리, 또는 필요한 것을 쟁취할 줄 아는 불도저 정신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위한 디자인이 잘 짜여진 사람들이다. 그럼, 일을 위한 디자인이란 무엇이냐. 이 주제로 아예 책을 쓴 저자 올리비아 리는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고, 학습하고, 해결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라 말했다. 리소스라는 핀이 콕콕 박힌 거대한 판 위에서 적재적소의 핀에 실을 감아 하나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디자인이 꼭 필요하단 뜻이다.
누군가는 UX/UI 디자이너라는 이 저자의 직업적 특성 때문에 ‘디자이너‘에만 한정되는 이야기 아니냐고 벽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일 잘하고 야무지다고 평판이 난 사람은 대개 다른 업무도 조금만 적응기를 가지면 척척 잘 해낸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일하는 표면적인 내용은 달라져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즉,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느 직무든,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경계 없이 적용되는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부지런한 법칙인 것이다.
그 본질은 크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처럼 ‘문제’를 관리하는 것과 ‘생각‘을 관리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문제를 관리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올바르게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든지 간에 문제를 정확히 읽고 시작해야 문제 풀이에 꼬임이 없다. 또 문제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풀이법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사실 말이야 쉽지, 막상 눈앞에 닥치면 이것도 문제 같고, 저것도 문제 같기 마련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책 안에는 대표적인 저자의 예시가 있었다.
최근 UX 개편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나에게 전달됐던 문제는 사용성 개선과 인터페이스 리디자인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단순히 표면의 UX 디자인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복잡해진 상품 구조, 그 구조에 매출과 KPI가 얽혀 쉽게 손대기 어려운 현실, 역할 경계가 흐려지면서 본질 밖의 일에 의미를 붙여야 했던 사람들의 사정이 겹쳐있었습니다.
…
그래서 나는 과제를 ’특정 상품의 리디자인이 아니라 ’조직 차원의 정렬과 일하는 방식의 전환‘으로 정의했습니다.
- 올리비아 리, 「일을 위한 디자인」 中
이처럼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진다면 문제 정의도 그만큼 겉이 아니라 본질에 가까워진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조직의 업무 분담과 시스템을 개편하자는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전환 시도와 그 전환에 이르기까지의 분석 과정이 굉장히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런 시도라면 어떤 문제에나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쉽진 않겠지만 이런 시도를 주니어 때부터 쌓아놓는다면 후에 누구에게나 본질을 짚어줄 수 있는 멋진 시니어가 되지 않을까.
그 이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으로 업무를 분류해 에너지를 분배하는 게 핵심이다. 할 수 있는 영역은 러프하게라도 쳐내놓고 할 수 없는 영역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해보는 것’. 머리를 맞대면 해결책이 띵! 하고 나올 때도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고민만 깊어져 간다.
그 순간 저자는 ‘실험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래야 모르는 영역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가장 갖기 어려워하는 태도가 나온다. 아마 상당히 많은 사회인들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데, 바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다.
나는 리스크가 싫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안전했으면 한다. 가끔은 앞뒤 재지 않고 들이박을 때도 있지만, 그조차도 최소한의 심리적 안전망이 세워져 있을 때의 얘기다. 그래서 이 부분을 마주쳤을 때 정말 눈이 질끈 감겼다. 사소한 것에도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나로서는 꽤 큰 도전이 될 터였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마주하게 될까. 그때마다 안전한 길만 택하다가는 답도 없어질 것을 알기에 더욱 심란했지만 그래서 더욱 솔직하게 이 조언을 새겨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조금 더 순탄해지려면 끝없이 배워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Unlear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작정 새로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재정의하고, 수많은 부분을 버리고 다시 채워나가는 것. 그래서 Learn보다 Unlearn이 더 어렵다고 한다.
이 태도를 가진 직장인은 끝없이 성장한다. 호기심을 가지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은 급격하게 단순해진다. 최근 큰 인기를 끈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2>‘의 후덕죽 셰프가 강력하게 떠오르는 대목이다. 취미가 젊은 세대의 핫플을 찾아가 새로운 메뉴를 맛보는 것이라고 하시던데, 그 태도가 후덕죽 셰프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이유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아직 세상이 복잡하기만 한 나로서는 여전히 경이로운 존재들이시다.
최근에는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낸 AI가 ‘나보다 실을 더 잘 감는데?’ 싶을 정도로 일을 잘해서 대부분 이런 본질을 놓치고 산다. AI가 짜놓은 결과물의 퀄리티를 보면 솔직히 사람이 왜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문제점을 지적해달라고 하면 일부터 백까지 고쳐야 할 점이 좌라락 나오고, 해결책은 A부터 Z까지 다채롭게도 제시한다. 심지어는 안부 인사조차도 AI의 힘을 빌려 해결한다.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완성도를 평가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AI가 만든 결과물을 사용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지점을 놓치면 결국 남는 건 빛깔 좋은 빈껍데기와 소모된 그래픽카드, 그리고 이미 흘러가 버린 냉각수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AI에 정성껏 프롬프트를 써넣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프롬프트를 끊임없이 입력할 줄 알아야 한다. 매번 명심하는 말이지만, AI는 역시 수단일 뿐이다.
결국 이 모든 건 나를 디자인 하는 과정이다. 일을 위한 디자인은 곧 나를 위한 디자인이기도 하다. 조금 피곤하긴 하겠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사회에서 직장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면 이렇게 살아가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이렇게 나를 디자인 하다 보면 환경이 그 톤앤매너에 맞춰질 것이고, 나도 모르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을지 모른다.
일이라는 것, 죽어도 하기 싫지만 해야 한다면 역시 이 책 속의 리더처럼 하고 싶다.
예측만 하다가 멈추는 대신,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함부로’ 실행하는 용기. 이 모험은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완벽한 계획보다 서툴고 무심한 실행이, 정답보다 나의 해석이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마세요.
기꺼이 흔들리면서,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세요.
우리의 속도로, 우리의 방식으로.
- 올리비아 리, 「일을 위한 디자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