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극장은 영원하다 - 2024 부산국제영화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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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오면 어김없이 부산을 생각하게 된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진입하는 그 한 중턱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부산으로 떠나는 이 작은 여행이 가을의 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영화제에서의 작고 사소한, 크고 거대한 행복은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행복은 행복 이전에 있다”라는 문장을 접한 적 있다. 각주에는 이런 말이 덧붙여 있었다. “행복, 그것은 행복을 기다리는 것이며, 행복을 앞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막상 여행지에서 느끼는 충만감이나 희열보다도 나는 자주 그곳에 놓이기까지 기다린 시간과 순간을 더 사랑한 것도 같았다. 날짜를 확인하고 기차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잡고 상영 시간표를 훑고 일정을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이 가을의 굳은 습관으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영화를 통과해 왔던가. 그 일련의 과정을 하나하나 수행하면서 나는 가을마다 여지없이 마음이 들뜨고 – 이미 여러 번 겪은 – 미래를 재생하게 된다.
2024 부산국제영화제 스페셜 피처 영상에는 헤어진 연인이 – 정확히는 남자인 화자가 –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그것이 전부다. 내가 그 영상에서 주목한 건 헤어진 연인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도 아닌, 나레이션으로 제시되는 대사 그 자체였다. “그래도 나는 그때가 그립습니다. 우리로 가득했던 그 여름날이. 우리의 시간이 추억이 된 순간부터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영상의 끝을 알리는 문구가 화면 위로 떠오른다. “THEATER IS NOT DEAD” 부산국제영화제가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는 문구다. - 극장은 죽지 않는다, 는 말이 꼭 극장은 영원하다, 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겠지만, 어쩐지 나는 극장만은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가능한 한 그것이 영원토록 지구상에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피처 영상을 보고 – 조금은 뜬금없이 혹은 제작진 측의 의도대로 – 영화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정확히는 부산국제영화제와 나의 관계를, 더 정확히는 매년 돈과 시간을 들여 부산에 가는 이유를, 영화제를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을의 추억이 되어 사라져 버릴 이 시간이 내게는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지난날의 경험으로부터 나는 부산에서의 시간을 매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아직 경험한 적 없는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건 조금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10월의 부산에서 매년 미래의 그리움을 얻고 오는 셈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은 63개국 224편으로 지난해 209편을 상영한 데 비해 약 8% 늘어났다. 매년 세계적인 거장의 신작을 발 빠르게 만나볼 수 있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뱀의 길> <클라우드>, 지아장커의 <풍류일대>를 포함해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브루노 뒤몽의 <엠파이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션 베이커의 <아노라>,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미겔 고메스의 전작 8편, 영화 <레토>(2018)를 감독한 키릴 세레브레니코프의 <리모노프: 에디의 발라드>, <호수의 이방인>(2013)을 연출한 알랭 기로디의 <미세리코르디아> 등 아시아와 유럽 영화계 거목들의 영화가 망라됐다.
아울러 TV 시리즈 <고독한 미식가>의 극장판과 A24의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시빌 워>가 오픈 시네마를 통해 야외상영으로 소개되었다. 한국의 해녀들을 통해 환경문제를 다룬 재미교포 수 킴의 미국 다큐멘터리 <마지막 해녀들>도 부산에서의 상영을 거쳐 현재 애플 TV+에 공개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역사상 처음으로 - OTT 콘텐츠인 - 넷플릭스 영화 <전, 란>이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는 지난해보다 예산이 절반이나 삭감된 부산국제영화제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하는 OTT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상생을 도모하는 시도로 보인다.
고백하자면 넘칠 듯한 기대감으로 떠나기 전부터 몸이 다는 영화가 없었음에도, 그래서 마음에 맞는 영화를 만나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음에도, 그런 걱정은 한갓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부산에 도착한 첫날부터 연신 감탄과 탄성을 자아내는 영화를 연이어 만났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재밌고 우습고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들 사이에서 나는 또 한 번 확신했다. 틀림없이 올해의 부산을 아주 많이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교차하는 부산에 매년 와야 할 이유를 다시금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작품들 가운데 조금은 더 오래 그리워할, 인상 깊게 본 영화를 소개한다.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Armand
영화를 보기 전, 내가 아는 사전 정보는 세 가지 정도였다. 첫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레나테 레인스베가 출연한다는 것, 둘째 잉마르 베리만의 손자인 하프단 울만 톤델의 첫 연출작이라는 것, 셋째 심리/미스터리를 다룬 영화라는 것. 레나테 레인스베가 출연하고 <제7의 봉인>(1957), 페르소나(1966) 등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손자가 연출했다는 사실은 영화를 향한 기대치를 끌어올리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어쩐 일인지 아르망이 유럽의 한 도시명이라고 생각한 나는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예측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도시는커녕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을 영화가 전혀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시간 내내 이토록 강도 높은 심리극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데서 오는 충격도 상당했다.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이하 ‘아르망’)은 불안한 기색으로 차를 모는 엘리자베스(레나테 레인스베 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엘리자베스는 교사 순나의 연락을 받고 급히 학교로 가는 중이다. 방학을 앞둔 학교는 한적하고 텅 빈 교실에서는 순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머지않아 다른 학부모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서로 안면이 있는 듯 엘리자베스와 상대측 부모는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엘리자베스는 순나로부터 곧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신의 여섯 살 아들 ‘아르망’이 반 친구인 ‘욘’을 성적으로 학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이 그런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충격적인 진실(혹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무엇)이 계속해서 폭로되는 가운데 관객은 인물과 함께 길을 잃고 사건은 점차 미궁으로 빠져든다.
<아르망>을 보면서 프란 크랜즈 감독의 <매스>(2021)가 떠오른 건 두 영화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성인이 아닌 아이 또는 학생이라는 점, 사건 발생 이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 사건 당사자는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혹은 드러내지 못하고) 그 부모가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아르망>과 <매스> 모두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건의 당사자가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제3의 인물을 통해서만 사건의 진실(혹은 그 배후에 있는 무엇)이 폭로되는 가운데 관객은 가해자와 피해자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사건을 직접 상상하고 재구성하는 위치에 놓인다. 물론 <매스>의 경우 실제 총기 난사 사건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피해 사실과 가해 혐의가 명확하게 제시된다. 사건이 일어난 지 6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양측의 부모가 그간 어떤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자녀를 잃은 비극을 공유하는 네 사람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끈질기게 응시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을 공유하고 구원과 용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매스>와 달리 <아르망>은 당사자를 완전히 배제한 채 – 영화에서 아르망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 진행되는 심리적 공방전에 가깝다. 진실을 포박하기 위한 심리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가 한 번 터진 웃음을 멈추지 않는 장면은 관객을 극단적으로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 영화는 아르망과 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를테면 엘리자베스가 미망인이라는 점이 화두가 된다거나 그의 남편이 엘리자베스에 의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내지는 혐의가 제기된다거나 양측의 부모가 실은 각별한 과거를 공유한다거나 사랑으로 정의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두 집안 사이를 오간다거나 하는 식이다. 어쩌면 인간사의 그런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지점 때문에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감독은 지적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아르망>을 인상 깊게 본 건 그것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때문이었다. 작품이 끝나고도 쉽게 떨쳐 지지 않는 강렬한 잔상 속에서 떠오르는 가정들, 의문들. 내가 만일 아르망의 보호자였다면. 피해자의 부모였다면. 혹은 두 부모를 중재하는 역할(순나와 같은)이었다면 나라는 인간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였을 것인가. 사건의 진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고 관객의 상상에 그것을 완전히 맡겨버린다는 점에서 <아르망>은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2023)를 떠오르게도 했다.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 혹은 제3의 인물이 주장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그 믿음의 척도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지. 진실의 부재를 다룬 이러한 영화들은 상상의 끝에서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다.
<바늘을 든 소녀>, THE GIRL WITH THE NEEDLE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 카롤리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터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있다. 배우자가 전사(戰死)했다고 생각한 그는 공장장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우연히 그와 눈이 맞는다. 연인 관계가 된 두 사람.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 카롤리네는 부유한 집안의 공장장으로부터 결혼 약속을 받아내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데 실패하고 설상가상 실직까지 한 채 거리를 떠돈다. 살길은 막막하고 삶을 돌파할 출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카롤리네 앞에 노인 다그마르가 나타난다. 다그마르는 가정형편으로 키우기 어려운 아이를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에 입양시켜 주겠다며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는 다그마르가 나타난 순간부터 장르를 선회하는가 싶더니 어느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을 카롤리네의 눈으로 응시하게 한다. <바늘을 든 소녀>이 관객에게 잊을 수 없는 체험을 선사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1910년대 덴마크의 유아 연쇄살인마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유아 연쇄살인마가 단지 끔찍한 인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가 법정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내세우는 주장은 모두 터무니없고 경악스러울 지경이지만, 나는 (살인마의 정체를 모르고) 아이를 넘길 수밖에 없던 그 시대 가난한 여자들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은 자신의 아이가 가난하고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길 원치 않았다. 남편이 없는 카롤리네처럼 아이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는 미혼모도 많았다. 불행한 삶에서 허우적대는 여인들을 대신하여 대리-죽음을 선사하는 유아 연쇄살인마의 모습이 경악스러운 한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 이유다. 그것이 또한 카롤리네가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고도 경찰에 고발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길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아울러 내가 주목한 건 영화가 구현하는 ‘체험의 문학화’였다. 영아살해는 대부분 생물학적 어머니에 의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영아를 살해한 어머니는 나이가 어리고 가난하며 미혼인 경우가 많다. 특히 출산 후 24시간 이내 신생아를 살해한 경우, 가해자가 두려움과 사회적 고립을 느끼고 우발적으로 살해한 경우가 다수였다. <바늘을 든 소녀>의 카롤리네나 다그마르를 찾아온 젊고 가난한 여자들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체험의 문학화’ 개념을 언급한 건 <바늘을 든 소녀>의 영아살해 양상이 문학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독일 문학에서는 영아살해 모티프가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여기서 아기를 살해하는 반인륜적인 범죄의 주인공은 많은 경우 정숙하고 도덕적이며 아름다운 젊은 시민계급의 여성으로 그려졌다. 대표적인 예가 괴테의 『파우스트 1부』의 그레트헨이다. 당시 18세기 독문학사에서 영아 살해범은 다른 유형의 범죄자들과 달리 일관되게 동정심을 일으키는 도덕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왜일까? 그것은 당대의 영아살해 문학이 16세기 중반에서 18세기 말까지 서구사회의 미혼모가 처했던 가혹한 현실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세 초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영아 살해범은 악마와 결탁한 마녀라는 통념으로 인해 마녀사냥의 희생을 피할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괴테의 『파우스트 1부』의 그레트헨은 절망 속에서 혼자 낳은 아이를 우물에 넣어 익사시킴으로써 영아 살해범이 되어 처형당한다. 『파우스트 1부』의 그레트헨과 <바늘을 든 소녀>의 다그마르. 왜, 누가, 어떻게 이 여인들을 그런 끔찍한 길로 이끌었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18세기를 지나 191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아살해는 – 주로 생물학적 어머니에 의해 – 꾸준히 반복되었다. 지금도 영아살해 관련 뉴스가 이따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아살해가 유행하던 시기 미혼모가 처했던 현실을 고려하는 데서 나아가 그 불행한 현실이 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지 고민하는 자세는 작품을 보는 또 하나의 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윤아경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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