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토록 지리멸렬한 모녀에 대하여
-
책 『딸에 대하여』를 펼친 건 영과 아침부터 말다툼을 한 날이었다. 어떤 이유로 영과 다투었는지는 이제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이 모든 것이 조금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 것, 내게 가해지는 비난의 말이 영의 목을 타고 칼날처럼 내리꽂힐 때마다 분노로 몸을 떨며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 등. 그런 충동적이기 짝이 없고 때에 따라서는 파괴적이기까지 한 정서가 내 몸을 짜릿하게 훑고 지나간 순간만이 어렴풋하나마 기억에 남아있다.
며칠이 지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영이 깎아 준 키위를 먹고 있다. 낮에는 같이 마라탕도 먹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다가 별안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이좋게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 것은 우리가 평생 반복해 온 일이고 나는 영과의 이런 극적인 관계가 우리를 단단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모녀, 라는 말은 어쩐지 우리 사이를 조금 납작하게 만드는 것도 같다. 그것은 ‘어머니와 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영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상처 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자 내가 평생 의지할 단 한 사람. 나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홀하도록 복잡하고 다채로운 관계로 얽혀있는 사이인 것이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오랜만에 영화 <레이디 버드>(2017)를 떠올렸다. – 두 작품이 같은 연도에 세상에 나왔다는 건 재미있는 우연이다. – 『딸에 대하여』가 30대 중반의 딸과 엄마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레이디 버드>는 10대 철부지 딸과 엄마의 관계를 조명한다. 그러므로 한창 20대를 지나고 있는 나의 삶과 이들의 것을 겹쳐 보는 건 실로 흥미로운 시도가 아니겠는가.
1. 모녀의 갈등
<레이디 버드>의 오프닝을 보자. 모녀가 한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한다. 모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의 한 구절을 듣고 감동한다. 침묵 속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모녀. 두 사람의 우정은 자연스럽게 나와 영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레이디 버드>의 모녀처럼 영과 나는 둘도 없는 책 친구다. 영은 최근 1,400쪽짜리 벽돌책을 읽고 있고 박완서의 작품을 독파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라고 했다. 영이 내 나이쯤 서점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책장을 열렬히 침범하면서 책을 추천하기도 하고 – 그렇게 만나게 된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고 오열한 기억이 내게는 있다. – 아니, 그 책은 영 별로던데, 은근슬쩍 (작가 몰래) 뒷담화를 까기도 한다. 최근 바오 닌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니 영은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은 그 책을 말도 없이 가져가 책장 한구석에 박아 두고 몇 주째 눈길도 던지지 않고 있다···. 나는 영의 책장에서 가져온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몇 년째 묵혀두고 있지만···.
그러나 우정의 눈물을 나누는 것도 잠시 영화에서 두 사람은 곧 다투기 시작한다. 작품의 배경이자 레이디 버드의 고향인 새크라멘토는 ‘따분한 변두리 촌 동네’로 소개된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이 사는 촌 동네를 벗어나 뉴욕과 문화의 메카로 상징되는 ‘동부’로 대학을 가고자 하지만, 엄마는 학비가 싼 새크라멘토 인근 시립대학으로 그를 보내려고 하면서 모녀의 말다툼은 격해진다. 엄마가 점점 강도 높은 비난으로 딸을 몰아붙이자 레이디 버드는 급기야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몸을 던져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레이디 버드가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이유를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다. 앞서 언급했듯 나 역시 영과 말다툼을 시작하고 감정이 격해지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러니까 평소에는 좀체 느끼기 힘든 실로 어마어마한 분노를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방황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비난받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으므로) 영과의 말다툼만큼 나를 끓어오르게 하는 일은 거의 없고 – 아마 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종종 추한 모습을 내보이며 상대를 헐뜯고 비난한다. 이 같은 모녀의 갈등은 『딸에 대하여』에서도 주요하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딸에 대하여』의 화자인 ‘나’는 수년 전 남편을 잃고 딸 하나가 전부인 60대 중반의 요양보호사다. 소설은 딸과 딸의 애인이 ‘나’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불거지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30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전국을 떠돌며 시간강사를 전전하는 딸에게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또 딸이 동성애자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를 내칠 수 없어 복잡한 심경을 느낀다. 딸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나’는 요양원과도 갈등을 겪는다. 병원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나’가 요양원에서 돌보는 노인 ‘젠’을 빨리 ‘처리’하고 싶어 한다. 젠에게 치매 끼가 있는 데다가 그를 살필 부양가족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든 젠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병원 측은 결국 젠을 “버스로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한눈에도 볼품없고 열악해 보”이는 요양원으로 보낸다. ‘나’는 젠을 불쌍히 여기며 병원 측에 사정해 그를 집에 데려온다. – 이는 딸과 젠을 대하는 ‘나’의 이중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렇게 딸과 딸의 애인, 젠과 ‘나’ 이렇게 네 명의 여자가 한집에 모이게 된다. 이처럼 『딸에 대하여』는 사회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세밀하게 포착하며 개인의 삶이 사회정치적 세계와 깊이 얽혀있다는 것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2. 가난은 어떻게 가족을 분열시키는가
두 작품에서 모녀를 갈등하게 하는 주된 원인은 ‘가난’이다. 『딸에 대하여』에서 ‘나’는 한때 교직에 몸담기도 했지만, 해외로 돈을 벌러 간 남편을 대신해 육아와 가사 노동을 전담하고자 교직을 떠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도배, 버스운전, 보험판매 등 임시직을 전전하며 딸을 뒷바라지한다. 독자가 책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마주하는 장면은 엄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는 딸의 모습이다. ‘나’는 결국 딸의 요청(비슷한 요구)을 거절하지 못하고 대출을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딸과 엄마의 갈등, 나아가 이것이 자본의 부재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와 딸의 갈등은 가난으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 동성애자인 딸이 교회 사람들 말처럼 정말로 대학의 잘 나가는 교수였다면, 그래서 ‘나’를 부양할 만큼 돈과 자본이 넉넉했다면, 이들의 갈등이 이토록 첨예하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가난과 불안정한 일자리라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나’는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 나라의 집세를 감당할 수가 없”어 가난에 허덕임과 동시에 “명백한 저임금, 비밀스러운 냉대와 멸시 속에 있는” 늙은 요양보호사다. 딸은 전국을 떠도는 시간강사 신세이지만, 그마저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불합리하게 해고당한다. ‘나’는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병원에서 암암리에 묵인되는 온갖 부조리와 비리를 눈감고 넘어가지만, 딸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권력 기관의 부당함을 항의하는 그의 목소리는 곧 특정 세력에 의해 짓밟히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딸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모녀의 갈등은 불거지고 딸을 향한 ‘나’의 감정은 더욱 복잡해져만 간다.
<레이디 버드>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작품 역시 오프닝부터 엄마와 딸의 갈등이 대학 학비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 레이디 버드는 학비가 비싼, 그러나 ‘지루하고 촌스럽지 않은’ 동부로 대학을 가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돈이 부족하다며 이들이 머무는 지역의 시립대학에 딸을 보내고 싶어 한다. 레이디 버드도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뿐인 대학인데! 자신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하지 않는 (듯 보이는) 엄마가 그저 미울 뿐이다. 한편 새로운 학년에 올라간 레이디 버드가 첫 남자친구를 사귀고 절친과 다투는 등 이런저런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동안 집안 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레이디 버드가 – 훗날 게이임이 밝혀지는 – 남자친구와 첫 키스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영화는 그보다 한 발짝 앞서 집안의 상황을 비춘다. “우리 이걸로 얼마나 버틸까? (...) 누가 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해?” 늦게 귀가한 레이디 버드를 혼내면서 엄마는 말한다. “네 아빠 이제 실업자야. 해고됐다고” 집안 사정이 어려운 걸 알면서도 아빠는 레이디 버드가 동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손을 쓰고 나중에 엄마가 이를 알게 되면서 둘은 또다시 갈등상태에 놓인다. 이처럼 가난은 그야말로 이들 모녀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3. 스스로 명명하기
두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은 딸이 예명을 쓴다는 것이다. 『딸에 대하여』에서 딸은 애인 ‘레인’에 의해 ‘그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 역시 스스로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친구들과 가족에게 자신을 본명이 아닌 예명으로 불러 달라고 한다. 특히 엄마가 자신을 본명으로 부를 때마다 발끈하며 자신은 ‘레이디 버드’라고 재차 강조한다. 예명을 짓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본명(given name)을 물려준 가족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므로 두 작품의 주인공이 스스로 예명을 부여한 건 가족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비약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이들의 예명이 – 그린, 레인, 레이디 버드 – 자연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 역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한편 『딸에 대하여』에서는 딸의 본명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엄마인 ‘나’는 딸을 ‘딸애’ ‘그 애’로 호명할 뿐이다. 딸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지움으로써 ‘나’와 딸 사이의 거리감은 더욱 두드러진다. 왜 딸의 본명은 언급되지 않을까? 이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성 정체성을 이유로 직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거나 외면당하는 상황은 아주 많은 ‘딸애’ 혹은 ‘그 애’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수자적 정체성은 『딸에 대하여』와 <레이디 버드>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부모가 있고 남자친구를 사귀고 퀸카와 노는 레이디 버드는 사회가 규정한, 이른바 ‘정상성’의 범주에 – 비교적 안정적으로 – 속해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레이디 버드가 무사히 동부 대학에 입학하고 자신과 오랫동안 불화한 엄마와 화해하는 결말에 이르는 것과 달리 『딸에 대하여』의 모녀는 끝까지 그 화해의 가능성이 유보된다.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긴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나한테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p.194~195
그럼에도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 여전히 내 안엔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내가 있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내가 있고, 그걸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내가 끝이 나지 않는 싸움을 반복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일일이 다 설명할 자신도, 기운도, 용기도 없다. p.195
김혜진이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언급하듯 어쩌면 이들 모녀의 갈등은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이 끝없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지는 작가의 말,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한마디는 이 작품이 결국 화해와 갈등을 되풀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관한 글임을 암시한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후반부, 엄마는 말한다. “난 네가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래” 이어지는 레이디 버드의 말.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어쩌면 모녀의 갈등은 영원한 숙명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토록 지리멸렬한 모녀의 관계는 결국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의 끊임없는 순환 같다. 그러므로 두 작품에서 내가 보는 것은 그러한 마음들 넘어 존재할 어떠한 희망(의 가능성)이다.
[윤아경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