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나오는 길목에 마지막 작품이 놓여져 있었다. 지인과 함께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가 설명을 읽고 탄식을 터트렸다. 그것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티라나 가족의 행위예술이었다.
브레멘 음악대(그림 형제의 동화) 인형 옷을 입고 공연하고 있는 분들은 알바니아 출신의 티라나 가족입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독일로 이주했으며, 현재 독일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상황입니다.
티라나 가족은 이번 전시를 위한 퍼포머로 임시 고용되었습니다. 시간당 각 8유로를 받으며, 하루 8시간 동안 연기합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그들을 만지거나, 방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삼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시간당 8유로면, 대략 만 이천 원이었다. 최저시급을 받으면서 조금의 기척도 없이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맨 위쪽에 있는 어린아이가 특히나 눈에 띄었다. 아동 착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자발적이었다고 해도, 국립 미술관에서는 이런 식의 퍼포먼스를 허용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여기까지 읽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면, 당신이 나보다 낫다.
문구보다는 아래의 작은 캡션을 자세히 보자.
앞서 설명한 작품은 김홍석 작가가 2006~2007년에 제작한 〈브레멘 음악대〉다. 재료는 사람이 아니라 레진, 폼 고무, 직물, 스틸, 나무다. 착취당하고 있는 것은 아동이 아니라 고무나 나무였다. 필자의 경우 현장에서 온갖 호들갑을 떨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진실을 알았다. 동행한 지인이 작품에 관한 기사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2026년 6월부터 10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전시에서는 이처럼 관객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전시명에서부터 말장난을 치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이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보란 듯이 깨트리며 경직적이던 머릿속을 환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코디 최, 〈스캠프스, 스크램 #1 (에너지 레벨에서의 자화상)〉
전시장 초입에서 해당 작품을 마주하자마자 호기심과 충격을 동시에 느꼈다. 줄지어진 나무 상자들이 '관'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시체 없는 관이었다. 작가는 물리적인 신체만을 죽음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한 인간의 자아 역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활용된 것이 바로 상자와 시간이었다. 머리, 손바닥, 복부, 성기, 발가락 등 신체의 각 부위가 상자 속에서 짧게는 20분, 길게는 3시간 동안 삽입되고 머물렀다. 그렇게 각각의 '에너지'가 축적된 상자들은 한 곳에 모여서 자화상이 되었다.
파격적인 작품의 배경에는 문화적 충돌과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다. 1983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코디 최(1961~)는 낯선 서구 환경 속에서 고립감과 소외감을 느꼈다. 그는 동서양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즉, 〈스캠프스, 스크램 #1 (에너지 레벨에서의 자화상)〉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떠도는 이민자의 신체를 기호와 상징으로 재정의 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김범, 〈풍경 #1〉
이 푸른 하늘을 보시오
이 나무들을 응시하시오
여기 흐르는 강을 보시오
텍스트를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한 폭의 풍경이 완성된다. 화면에는 하얀 구름도, 흐르는 시냇물도, 조그만 나뭇잎의 그림자조차도 없는데도 그렇다. 〈풍경 #1〉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특정 사고로 이르는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개념미술에서 지시문은 일종의 수행적 언어이기도 하다. '보아라'나 '움직여라'와 같은 명령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실제 행위를 유발한다.
성능경, 〈현장 1〉
해당 작품은 신문 보도사진에 삽입된 점선, 화살표, 원 등의 편집 기호를 재촬영하고, 그 위에 작가가 직접 새로운 기호를 덧그려서 인화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보통 신문 편집자들은 사건과 인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호를 삽입한다. 정보 전달의 효율성과 명료성을 추구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때로는 독자의 시선을 통제하고 이미지의 해석을 단정 짓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해당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유명한 그림이 떠올랐다.
가짜 뉴스나 언론플레이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무엇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기도 한다. 언론은 거짓말 없이도 상황을 왜곡할 수 있다.
성능경 작가 역시 미디어 매체가 지녀야 할 책임감에 대하여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것을 접하는 독자들이 가져야 할 경각심에 대해서도.
언어라는 수단의 함정
전시에는 다양한 언어, 기호, 그리고 오브제가 등장했다. 이들은 기존의 관념을 뒤엎고 흔들며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결국 국립현대미술관을 나오면서 든 감상은 다음과 같다.
언어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설명하고자 만들어진 도구일 뿐이며, 사물과 언어의 사이에서 누락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글을 읽다가 당신도 그 틈을 얼핏 인식했다면.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누락본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보는 건 어떨까. 남들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시에 작품을 출품한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