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값이 밥값보다 비싸고 OTT며 유튜브며 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근처의 CGV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브스턴스」를 보고 싶었다. 고어 영화가 대체 어떻게 한국 여자들의 마음을 빼앗았는지가 궁금했다. 서브스턴스는 지난 24일에 누적 관객 수 50만 8,854명을 기록했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독립 예술영화가 한국에서 5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다.
상영관이 암전되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등장인물이 새우를 추접하게 까먹어서 그랬다. 조금 더 지나서는 아예 눈을 감았다. 6살 때부터 줄곧 주삿바늘만 보면 소스라치는데, 여자 주인공이 주사기를 집어 들고 마구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거릿 퀄리가 데미 무어의 몸을 찢고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극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마거릿 퀄리가 연기하는 수(Sue)는 예상대로 아름다웠고, 생각했던 것보다 씁쓸했다. 데미 무어의 엘리자베스는 여성들이 그곳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요소들을 끌어낼 줄 알았다. 처음에는 흠칫하며 놀랐다가 후에는 공감하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렇게 영화와 혼연일체가 되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와중에 그것이 시작됐다.
바디 호러: 인체의 훼손이나 변형 등에 중점을 둔 호러의 하위 장르. 단순히 상처를 입거나 피를 흘리는 정도를 넘어 몸이 썩어 문드러지거나 기생물이 몸속에 들어가는 등 좀 더 기괴하고 불쾌한 변형이 있어야 바디 호러 장르로 분류된다. (출처 나무위키)
영화관을 나가고 싶었다. 시각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나중에는 눈을 가리는 것도 포기하고 넋을 놓았다.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나올 때쯤에는 브레인 포그가 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유달리 고요하게 흐르던 적막은 분명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많은 관객들이 평소처럼 벌떡 일어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겨있다가 정신을 반쯤 놔두고 상영관을 나왔다. 친구들에게 곧바로 후기를 공유하고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보며 천천히 진정할 수 있었다.
공포 영화를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영화관 안에서 유혈이 낭자하고 귀신이 입을 벌려도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해사한 빛이 관객을 맞이한다. 영화와 현실은 순식간에 분리되고, 여운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간에 희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브스턴스」는 아니었다. 상영관을 빠져나왔는데도 영화가 끝나질 않는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카페에서 리뷰를 찾아보다가 말문이 막혔던 일이 있다. 아마도 영화 「사랑과 영혼」이 개봉할 당시에 전성기였던 중년의 댓글인 듯했다. 주연 배우를 상대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놓고 또 영화를 찍는다'며 비난했다. 평소 같으면 거 참 너무 하시네, 하고 넘겼을 댓글이지만 이번에는 와 닿는 감정이 남달랐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한때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명예의 거리까지 입성한 대스타였지만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리즈 시절을 잊지 못한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주인공이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업보를 받은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주변에서 그녀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50살이 되자마자 프로듀서 하비가 그녀를 불렀다. 여기서 문제의 '추접스러운 새우 까먹기'가 나온다. 그런데 사실 진정으로 역했던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새우가 아니라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었다.
여자 나이 50이면 뭐···
끝이지?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생일날 해고를 당한 그녀는 한참이나 방황한다. 그리고 결국 '서브스턴스'를 자신의 혈관에 꽂아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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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말이 있었다. 24살에 제일 잘 팔리다가 25살이 넘어서는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서 가수 송지은이 「예쁜 나이 25살」을 발매하기도 했었다.
중년의 여배우가 연기를 이어간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 댓글을 보며 복잡한 생각이 든다. '하비'는 타노스나 슈렉이 아니다. 여자의 나이를 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아주 많다. 같은 여자끼리도 말을 얹고는 하니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케이크 신세를 면치 못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그저 상한선이 올라갔을 뿐이다. 유통기한이 아주 조금 길어진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미모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을 뻗는
다시 젊음을 되찾고 싶다. 누구보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모두의 사랑을 받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강렬한 욕망은 엘리자베스가 정체도 모를 약에 손을 대도록 만들었다. 영화라서 다행인 부분이었다. 현실에서는 다이어트약을 먹다가 정신병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23년도에 한 여성이 다이어트약을 과다복용하고 조현병에 걸려 상습 절도를 하다가 붙잡혔던 일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엘리자베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명예와 부가 차고 넘치도록 있으니 만족하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저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기고 넘겼다. 하지만 영화적 허용이 아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유혹은 현실에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스타를 했다. 새삼스럽게, 성형 광고가 이렇게 많았었나 싶었다. 인플루언서들은 대체 무슨 성분으로 만든 건지도 모를 다이어트 효소들을 공구했다. 유튜브로 들어가자 브이로거들이 각종 시술을 추천하고 있었다. 마치 저녁 메뉴를 골라주는 것 같았다. 전부 평소에 좋아하고 자주 보던 유튜버들이었다.
그제서야 며칠 전에 인모드를 받아볼까 고민했던 일이 생각났다. 어릴 적에 비해서 동그래진 턱선이 신경 쓰여서였다. 잘 한다는 병원까지 알아보다가 부작용으로 살 쳐짐이 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만뒀었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과연 나에게 엘리자베스를 한심하게 볼 자격이 있나?
모든 것을 보고서도 너무 아름답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괴감이 들었던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영화를 그렇게 봐 놓고서 마거릿 퀄리의 외모에 계속해서 감탄한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도 배우를 따로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 알게 된 비하인드가 있는데, 사실 수의 완벽한 몸은 실리콘 모형을 덧붙여서 만든 것이다. 완벽함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아름답다'는 감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여담으로, 영화가 흥행한 뒤에 배우의 인스타 팔로워가 늘어났다고 한다.
서브스턴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의 세상'에서는 특히 그렇다. 갤러리에 들어가면 예뻐서 저장한 마거릿의 사진이 보이고, 아침에 붓기가 심하면 또다시 인모드나 슈링크를 검색해 볼지도 모른다. 살을 빼기 위해서 밥을 굶고 무식하게 운동한다. 그러면서 근육이 심하게 생길까 봐 무게를 많이 들지 않는다. 숱이 적은 눈썹을 브로우로 채우지 못하면 친구와 동네 마실도 나가지 못한다.
언젠가는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전인류에게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은 바라지도 않으니 나의 작은 세상만이라도 조금 발전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개인적인 규칙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부작용이 있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정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침묵을 나눴던 옆자리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편안해지기를 바란다. 아주 만약의 일이지만, 그렇게 개인의 변화가 찾아오면 언젠가는 세상의 변화도 찾아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