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 눈만 눈이냐! [미술/전시]

잠자리도 있고 물고기도 있다
글 입력 2022.04.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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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 “입장을 바꿔 놓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자 : “아니, 입장을 왜 바꿔요? 내 입장이 훨씬 좋은데…”

 

‘인생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는 [멜로가 체질]에서 썸타는 남녀가 다투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다. 그렇다. 남의 입장이 된다는 것, 그거 말처럼 쉽지 않다. 입장을 바꾸지 않겠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남자가 오히려 솔직하고 당당하다. 다른 입장,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별로 오래 살지 않은 나도 그 정도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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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은 부담스럽지만 엉뚱하게도 사람 아닌 사물의 시각은 가끔 궁금하다. 마카롱에 꽂혀 한 달 내내 마카롱만 먹던 시절에는 마카롱이 세상을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엠보싱 처리로 부피감 있고 겉은 반질반질한 보냉백에 담겨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마침 내 머리통에 맞는 크기여서 얼굴을 냅다 넣어 봤다. 예상했던 대로 깜깜했지만 무게가 거의 없는 보냉백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부에 닿는 건조한 느낌이 색다른 질감이었다.


이 밖에도 한강에 있는 풀들한테는 세상이 또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 땅에 얼굴을 대고 누워서 옆을 보기도 했다. 또 나보다 작은 친구의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는 “아~ 네가 보는 세상은 이렇구나~” 하곤 한다. 물론 키가 작은 친구를 놀리려고 한 장난이지만 실제로 친구의 시야가 궁금했던 것도 약간, 아주 조금은 있었다.


나만 이러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그리고 훨씬 더 진지하게 ‘입장을 바꿔서 보는’ 작가가 있었다. 바로 조각가 이형구(1969~)다. 2008년, 스위스의 자연사박물관에서 도날드 덕, 톰과 제리, 벅스 버니 같은 만화영화 주인공의 골격을 역추적해서 만든 인공 뼈를 진짜 동물의 뼈들과 나란히 전시한 인물이다.

 

이형구는 물고기의 시야에 관심이 생겼다. 친구 집에 놀러가 어항 속의 물고기와는 절대로 눈을 마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굳이 물고기와 눈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엉뚱한 호기심과 관찰력이다.


2010년에 열린 개인전 ‘안구 추적(Eye Trace)’은 ‘시각’이라는 감각기관에서 출발한다. 외부의 자극이 눈을 거쳐 뇌에 전달되고 나중에 신체에 반응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눈과는 다른 구조를 가진 곤충이나 물고기 등 여러 동물의 시각 기관을 가상 체험하게 한 다음 돌아와 다시 인간의 시선에 집중하게 만든다.


유사 과학자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이형구는 동물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실험한다. 그는 곤충이나 어류의 시각을 재현하는 기구를 만들어 착용하고 직접 동물 되기를 시도한다. 물고기처럼 보기 위해 네모난 종이박스 양 옆에 구멍을 뚫고 머리에 뒤집어쓰고 걸었다. 한 번에 두 눈으로 볼 수 없어 한쪽 눈으로 번갈아 가며 움직이다 보니 몸이 물고기가 헤엄치듯이 유선형을 그렸다. 이를 작품으로 만든 ‘Fish eye gear’는 방호복의 얼굴 양쪽에 확대경을 달아 물고기의 시각기관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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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 Eye Gear

2010 magnifying lenses, clear plastic, aluminium, leather straps, rivet, chemical protective clothing 가변크기


 

또 의자 맞은 편에 여러 개의 볼록거울을 매달아 여러 개의 겹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곤충의 시각을 체험할 수 있는 작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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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Canopy

2010 convex mirrors, chair, aluminium, leather straps, swiss army backpack part, pulley, clear plastic hose, vodka, clamps, rivets, screws, bolts, nuts, stainless steel wires 158x150x100cm


 

이처럼 작가의 시리즈는 물고기 말고도 전시장 바닥을 기어 다니는 곤충의 시선으로 보기, 사슴의 탈을 쓰고 사슴의 무리 속에 들어가기 또는 잠자리가 되어 빙빙 회전하는 등 서로 다른 유기체의 시각기관을 테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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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깨달음을 얻는다.


“기어가는 곤충들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날아다니는 잠자리의 겹눈으로 세상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내가 보는 이것이 맞는 형태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내 눈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 의심하고 반성해야겠죠. 시선이 문제가 된다면 타인의 시선으로 한번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시점이 달라서 싸우는 것 아닌가요? 상대방의 시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난해하고 엽기적이며 일기 같은 현대미술 작품들 속에서 이형구는 감각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때에 따라 유머가 넘치지만 과하지 않아 영악함과 영리함의 위태로운 경계를 즐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들이 손으로 만들어지는 순간에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작가의 비현실적인 판타지는 역으로 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내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정말 세상의 실체일까? 반대로 다른 생물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시각 또한 판타지 혹은 가상세계의 일부가 아닐까? 예술은 현실이 아닌 허구이지만, 관객들은 예술에서 현실성이 얼마나 있는가를 끝없이 평가한다.


시각에 따라 판타지가 될 수도, 일상의 현실로 마주볼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육체의 한계에 갇힌 인간의 틀을 벗어나게 만드는 이형구 작품의 판타지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한편 현실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판타지를 차용하는 작가의 영리한 계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 출처-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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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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