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의 『절창(切創)』은 타인의 상처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이해’라는 행위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대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관계를 깊게 만들고, 나아가 서로를 구원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타인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할까. 오히려 그것은 상대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은밀하고도 사적인 영역까지 파고드는 침범은 아닐까.
이 글에서는 작품이 보여주는 ‘상처’라는 장치를 중심으로 이해가 때로는 어떻게 침범이 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욕구를 멈출 수 없는지 풀어보고자 한다.
작품 속 주인공의 능력은 타인의 상처에 닿는 순간 그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이해’라는 행위를 매우 극단적이고 판타지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들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과정이 생략된 채 곧바로 타인의 내면으로 진입하는 과감한 전개를 보인다.
문제는 그 과정에 기꺼이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상대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인의 상처를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감추고 싶어 했을지도 모를 가장 깊은 영역까지 침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지점에서 이해는 더 이상 배려나 공감이 아니라, 상대가 설정한 최소한의 경계를 넘는 침범으로 변모한다.
무언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보는 건 어떨까. (중략)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비로소 이해하는 것은 그가 행하거나 그를 둘러싼 모든 사태가 끝장나기 시작할 때지. 그러니 우리는 불이해 혹은 오해를 이해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고작이야. 이해란 자기만족에 불과할 수 있고, 나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는 서로 달라서 둘의 이해가 충돌하게 마련이니까.
『절창』 p.301-302
그러나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를 단순히 폭력적인 행위로만 봐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상처를 통해서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역설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는 상처를 드러내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꺼냄으로써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이해하려는 시도는 타인의 내면을 침범하는 위험을 동반하면서도,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필연적인 방식이 된다. 상처는 관계를 무너뜨리는 요소이면서도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로 작용하는 것이다.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절창』 p.344
『절창』은 이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상처에 다가가는 일이며 그 과정은 때로 선을 넘는 침범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를 멈출 수 없다. 책 속의 문장을 빌리자면, 어쩌면 상처 없는 관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개방함으로써 비로소 가까워질 수 있고, 그 상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이해는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도, 완전히 배제해야 할 침범도 아니다. 아마 그것은 타인에게 닿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불완전하지만, 필연적인 선택에 가깝다.
결국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 채, 그럼에도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불확실성 속의 용기로부터 관계는 마침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