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고춘자, 나이는 이제 막 칠순. 아들 둘을 키우기 위해 평생 초등학교 앞 떡볶이집을 홀로 운영해온 우리의 춘자씨는 칠순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고깃집에 왔다. 그 이름을 또박또박 읽어보니... 소, 원하는 대로 다 돼지? 소원. 우리의 춘자씨도 항상 바라왔던 소원이 있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생일 소원을 빌려 하니 떠오르질 않는다. 흐릿해진 정신과 갑자기 일어난 소란, 그 속에서 빠져나온 춘자씨는 잃어버린 소원을 찾기 위해 이상한 나라를 떠돌기 시작한다.
여가 어디요, 나가 누구요
밤은 어두워져 가는데 영혼의 물고기를 따라 길을 헤매는 춘자씨와, 그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가족들. "요즘 어머님이 인지 능력이 떨어지셔서-"라며 춘자 씨의 실수를 해명하던 며느리 '다정'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의 춘자 씨는 치매 환자다. 춘자 씨는 밤중에도 여러 번 되뇐다. "여가 어디요, 나가 누구요..."
영혼의 물고기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인지 능력'을 상징하는 장치다. 아이와 노인은 영혼의 물고기 수가 같다. 아이의 물고기 수는 점점 커지고, 노인의 물고기는 점점 사라지는 것만이 차이점일 뿐이다. 소원을 되찾고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춘자 씨는 물고기의 조언을 되새기며 모험을 계속한다. 그렇게 춘자 씨의 '소원 찾기'와 가족들의 '춘자 찾기'가 무대 위에서 교차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꽉 닫힌 해피엔딩이다. 춘자가 간직하고 있던 소원은 결국 가족을 향한 애틋한 사랑 그 자체였고, 아들 둘과 며느리 역시 춘자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어머니가 숨겨두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눈치채게 된다. 평생을 바쳐 만들어온 떡볶이가 미식 사업가 '백정언'의 향수를 자극해 무려 밀키트 사업의 계약을 맺게 되고, 돌아온 고춘자 인생의 인생역전을 불러왔다는 재치 있는 결말로 눈물바다였던 분위기를 살짝 비틀며 극은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보는 내내 마음 한 켠이 내내 불편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소원 대신 이 이유를 찾아보려 한다.
노인은 보기만 해도 맘 아프지
우리나라는 늙어가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고 나이 드는 게 당연하지만, 나라가 늙어가고 있다는 건 사실 문제상황이다. UN에서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하게 되면 고령화 사회로, 20%부터는 초고령 사회로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지난해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와 동시에 명백하게 노인이 소외되는 사회다. 현명한 어르신보다는 꼰대,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는 인식이 더 강할 정도로 노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고, 스스로 나이듦에 대한 인식 또한 참담하다. 복지제도까지 갈 필요도 없이, 기차 좌석이나 야구 경기 등의 표를 구하는 것도 어려울 만큼 일상 곳곳에서 노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상황이다.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인데도 노인을 기피하고, 또 노인의 삶을 위한 논의를 회피하고 있다니. 한국은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다.
아이는 귀엽고 노인은 안 귀엽지
아이는 가볍고 노인은 가엽지
아이는 예쁘고 노인은 안 예쁘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노인은 보기만 해도 맘 아프지
아이는 손 잡고 나들이 가고 노인은 손 잡고 병원을 가지
아이는 날마다 자라나고 노인은 날마다 죽어가지
-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中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노인인식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영혼의 물고기는 위와 같이 노래한다. 노인은 아이처럼 말이 안 통하지만, 아이와는 달리 소모적인 존재라고 말이다.
이는 춘자씨가 늙어가는 스스로를 보며 느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언젠가 늙은 스스로를 보며 느낄 당혹감과 슬픔을 보여주고자 한 대사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사회에서 말하는 '청년 세대'에 속하는 나는, 조금의 타격 없이 이렇게 곧바로 의도를 해석해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춘자씨와 같은 나이에 이 공연을 봤다면 어떨까? 그저 담담하게, 혹은 조금은 쓸쓸하게 공감하며 그냥 넘길 수 있을까? 공연에서마저 내가 죽어가는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말 괜찮을까?
어떤 대사든 무대 위에 올라온 순간 하나의 선언이 된다.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노인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치는 시점에, 노인의 비참함을 노래할 때는 더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그릇된 현실을 똑같이 재현하고, 그 이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결국 잘못된 프레임을 전시하는 것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노인의 쓸쓸한 감정이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잘못된 사회인식 속에서 발생한 감정이, 비참하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로 그려지는 상황이 불편했다. 객석에서 느낀 이 불편함까지도 의도한 것이었다면 할 말이 없겠다.
되찾은 소원 속에 고춘자는 없다
끝내 찾아낸 춘자씨의 소원은, 요약하자면 이것이었다. 사고로 남편과 막내딸 소희가 세상을 떠난 뒤, 남은 아들 두 명이 잘 자랄 수 있게 옆에서 지켜줄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하늘로 돌아가게 되면 그리운 얼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결국 그 소원마저도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삶을 위해 묻어두었던 자신만의 작은 취미나 취향, 꿈이 소원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었다. 춘자씨는 자기가 어머니 역할을 잘 해낼 수 있길, 두 아들들이 행복하기만 하길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결국 인생을 전부 가족을 위해 바친 것이나 다름 없다.
이 안에서 인간 '고춘자'는 어디 있을까, 감히 질문을 던져본다.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 같은 사랑에 감사를
아쉬웠던 부분을 굳이 파헤쳐 보았지만, 이러한 부분을 뒤로 하고 결국 눈물을 쏟아내게 되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나 역시도 이렇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어머니의, 그리고 아버지의 딸로서 너무 많은 것을 누리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숭고한 헌신은 때때로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는 그렇게 모든 걸 희생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괜한 부채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족주의를 담은 작품이 번번이 비판을 받으면서도 만들어지는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실제로 우리의 앞 세대까지만 해도 가족을 위해 일생을 바치며 살아온 이들이 너무 많고, 그들은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습관처럼 사랑을 퍼주며 일생을 사셨다. 그 덕분에 지금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있다. 결국 감사하는 마음 하나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만 하고픈 말은, 이 작품을 만들고 바라보는 이들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라는 감상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개선하기 위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돌아봐야 한다. 그 어느 작품보다 가까운 이야기여서일까, 막연히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겠다는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