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아사코>를 봤다. 최근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충격적인 영화였다. 그리고 보는 내내 이상하게 헛웃음이 나왔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정말 이상한 영화였다. 그렇지만 왠지 자꾸 생각난다. 여러모로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는 영화다.
영화의 제목처럼 주인공은 아사코다. 아사코는 사진전에서 우연히 만난 자유분방한 느낌의 바쿠에게 첫눈에 반해 사귀게 된다. 아사코와 바쿠는 전형적인 청춘 남녀처럼 둘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간다.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가 나 바닥에 나뒹굴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다 대뜸 키스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바쿠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아사코와의 관계도 정리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리고 아사코 역시 바쿠가 사라진 뒤, 자신이 살던 오사카를 떠나 도쿄로 향한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진다.
도쿄에서 카페 일을 하며 살아가던 아사코는 우연히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를 만난다. 료헤이는 바쿠와 닮았을 뿐, 성격부터 직업까지 모든 면이 바쿠와 정반대였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인 바쿠와 달리, 료헤이는 다정다감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바쿠와 너무 닮은 외모 때문에 아사코는 료헤이를 일부러 피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점점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3월 11일, 료헤이는 자신을 피하는 아사코를 찾아다니다 우연히 그녀를 마주친다. 아사코 역시 지진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료헤이를 찾아 나선 참이었다. 이 순간, 아사코는 료헤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둘은 연인 관계가 된다. 지진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통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을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료헤이와 5년 정도 교제하며 동거하던 중, 아사코는 우연히 바쿠가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네가 내 첫사랑을 닮아서 좋아했어’라고 털어놓는데, 료헤이는 그런 아사코를 이해해 준다. 그리고 둘은 약혼한 뒤 함께 살 집을 알아보며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이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바쿠가 갑자기 아사코 앞에 나타난다. 아사코와 료헤이의 약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말이다. 아사코는 충동적으로 료헤이 대신 바쿠를 선택한다. 그리고는 바쿠의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도쿄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에게 ‘료헤이에게 내 짐 다 버려달라고 해줘’라고 전해 달라고 한 뒤, 핸드폰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이 장면에서 아사코의 선택은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료헤이와 결혼까지 앞둔 상황 속에서 바쿠를 선택한다는 건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사코는 자신의 감정을 중심으로 선택하고 행동한다. 바쿠가 떠난 뒤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라진 것부터, 료헤이를 두고 바쿠를 따라 떠나버리는 것까지. 아사코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어찌 보면 아사코의 감정에 충실한 면이 부럽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나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말이다.
가끔 영화 주인공들의 제멋대로인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이들이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아사코도 그런 영화 주인공이다. 첫눈에 반한 사람과 영원할 것처럼 사랑하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첫사랑을 선택해 떠나 버리는 모습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아사코가 왠지 부럽기도 했다. 내가 그러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부러웠다.
하지만 아사코는 결국 바쿠를 따라가지 않는다. 영화 내내 수동적으로 그려졌던, 어찌 보면 남자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였던 아사코는 처음으로 본인의 의지로 ‘료헤이에게 가야겠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쿠에게 차를 세워 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아사코는 걷고 또 걸어서 다시 료헤이에게로 간다. 료헤이는 아사코의 행동에 큰 상처를 입었기에 처음엔 다시 돌아온 아사코를 밀어내지만, 결국 그녀를 받아들인다.
아사코는 두 사람이 같이 살기로 했던 아파트에서 더러워진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주 예쁘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앞으로 너를 절대 믿지 못할 거야’라고 한다. 이 대화는 둘의 관계가 이미 되돌릴 수 없이 더럽혀졌고, 서로에 대한 신뢰 역시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사람 마음이란 뭘까. 그렇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대체 뭔지 모르겠다. 료헤이는 평생 그 상처 속에서 살아갈 테지만 결국 가슴이 시키는 대로 아사코에게 문을 열어준다.
몇 번의 선택의 순간이 찾아와도 료헤이는 결국 아사코를 택할 것이다. 비슷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같은 선택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이자 숙명인 것 같다. 삶이 어렵고 복잡한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료헤이였어도 문을 열어주었을 것 같다. 아사코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더라도, 지금 아사코를 놓친다면 오히려 더 큰 절망 속에 살아가게 될 것 같다. 누군가를 잃을까 두렵고 불안하면서도, 그럼에도 계속 곁에 있고 싶은 모순적인 마음이 사랑인 걸까? 이런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나도 한 번쯤은 느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참 많은 영화였다.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존재에 대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내렸던 수많은 선택에 대해서도 말이다.
<아사코>에 대해 글을 쓰면 쓸수록 더 많은 생각이 든다. 장면 하나하나가 자꾸 떠오른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 건 처음이다. 왠지 꿈을 꾸고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은 투명하고 맑은 구슬같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지만, 파도가 아무리 세게 쳐도 깨지지 않게 견고하다. 나는 <아사코>가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인간의 숙명, 그리고 비슷한 순간이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