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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약속이 남긴 것들

장난감 하나에서 시작된 믿음의 무게

by 최아정 에디터
2026.10.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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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엄마는 무언가를 잘 해내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약속하곤 했다. 밥을 남기지 않고 먹거나, 받아쓰기에서 백 점을 맞거나, 떼쓰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 갖고 싶은 장난감이 생기면 평소에는 하기 싫었던 일도 제법 열심히 했다. 그러니까 내게 약속은 노력 끝에 따라오는 보상이었다.


      물론 약속이 언제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깜빡하거나 사정이 생겨 장난감을 사주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지킨 약속부터 떠올렸다. 하기 싫은 일을 참았던 시간, 장난감을 손에 넣을 생각에 들떴던 마음까지. 어른에게는 사소한 말 한마디였을지 몰라도 어린 내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이유였다.


      엄마가 약속을 미루면 나는 며칠이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언제 사줄 거냐고, 정말 사줄 거냐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내가 열심히 지킨 약속을 엄마가 잊었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내가 기다린 건 표면적으로는 '장난감'이었지만 엄마가 한 말을 지켜주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자 약속의 모습도 달라졌다. 더 이상 약속을 지켰다고 장난감을 받을 나이는 지났다.  머리가 커지고, 시간이 흐르며 관계의 돈독함을 위한 지표가 되었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신뢰가 쌓이고,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믿음이 빠져나간다.


      직장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하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맡은 일을 기한 안에 마무리하고, 자신이 하겠다고 말한 일을 책임지는 것. 대단한 능력처럼 보이지 않는 이런 일들이 누군가를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흔히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좋은 동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약속한 날짜를 번번이 어기거나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면 그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반대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레 믿음이 간다. 적어도 그 사람이 맡은 일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불안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약속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정한 시간에 맞춰 누군가도 자신의 시간을 조정하고, 내가 하겠다는 말을 믿고 다음 일을 준비한다. 그러니 약속 하나를 어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하루를 흔든다. 당사자에게는 사소한 일정 변경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고, 아무리 노력해도 약속을 지키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지키지 못할 것 같다면 미리 알리고, 상대방이 감수해야 할 불편을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태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보다 그 이후의 행동이 더 오래 기억될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까운 사람과의 약속 앞에서 종종 너그러워진다. 정확히는 상대방이 너그러울 것이라고 마음대로 짐작한다. 친구니까 이해하겠지, 가족이니까 괜찮겠지. 직장에서는 몇 분의 지각에도 신경을 쓰면서 정작 가까운 사람의 기다림에는 무심해지기도 한다. 친밀함이 약속을 가볍게 여겨도 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시간을 잠시 빌리는 일과도 같다. 만나기로 한 날을 위해 다른 일정을 미루고, 해야 할 일을 서둘러 마치고, 때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선다. 약속을 취소하는 데는 문자 한 통이면 충분하지만, 상대방이 그 시간을 위해 기울인 마음까지 되돌릴 수는 없을테니까.


      어린 시절에 장난감을 얻기 위해 약속을 지켰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는 어른이 된 나는 생각한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무언가를 얻기 위한 행동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한 행동일까.


      돌이켜 보면 엄마와 나눴던 약속에도 장난감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엄마가 약속을 기억하고 지켜준 날에는 다음 약속도 기꺼이 믿을 수 있었다. 반대로 약속을 잊은 날에는 몇 번이고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믿음이란 어쩌면 그렇게 사소한 경험을 반복하며 자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약속을 지킨 대가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한 말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 사람의 하루에서 내 몫으로 남겨둔 시간이 결코 당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난감은 시간이 지나면 낡거나 잃어버리지만, 누군가가 끝내 지켜준 약속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어릴 적 엄마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약속의 무게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약속 자체보다 그 말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오늘 나를 위해 기다려준 강아지를 위해 집에가면 간식을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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