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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Prologue. 꿈이 말하거늘


 

꿈에 찾아오는 한 남자가 있다. 아니, 이제는 있었다, 하고 완전한 과거형으로 말해야 할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꿈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글로까지 적은 뒤로는, 어디선가 자기 얘기를 전부 듣고 있었는지 발길을 아예 끊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꿈에 나타난 건 2년 전 봄. 안면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그는 꿈에서만큼은 나의 친근한 지인이다. 꿈에서 그와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작은 날벌레 한 마리가 날아와 성가시게 맴돌았고, 나는 대충 팔을 휘적거리다 끝내 참지 못하고 두 손바닥을 날렵하게 펼쳤다. 그 순간 그가 말했다. “귀엽지? 내가 키우는 애야.” 나는 얼른 손을 뒤로 감추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응. 귀엽네.” 그는 내가 벌레를 죽이려던 걸 눈치 채지 못한 듯 여전히 상냥한 말씨로 그의 반려벌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이야기했고, 내용이 귀에 들어올 리 없는 나는 저지를 뻔한 아찔한 사고를 상상하며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반려벌레라니, 황당하고도 귀여운 꿈이라며 웃어넘겼지만, 나는 그 꿈이 내게 전하려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꿈은 도망칠 수 없는 감정의 막다른 골목으로 나를 데려다놓는다는 걸 이해하면 더욱 그랬다. 나는 자연이 주는 생생함이 언제나 버겁고, 동시에 그 생생함 속에 스며들고 싶다.


*


유년기부터 나는 자연과 늘 거리감이 있었다. 돌잔치 사진 속 나는 딸기의 오돌토돌한 촉감에 인상을 쓰고 있고, 유치원 소풍 날의 희미한 기억 속에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못해 보도블럭 위 벤치에 혼자 앉아 김밥을 먹는 나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메아리 같은 부름이 있다. 성묘길에서는 풀과 흙, 깨밭이 싫어 꽤 큰 나이까지도 부모님 등에 업힌 채 친척 어른들의 놀림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이건 그냥 땅이다’ 주문을 외우며 억지로 잔디밭에 걸어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발아래에는 여전히 시선을 둘 수 없었다. 단순히 촉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추측하건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는 감각이 과해지는 탓이고,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도시의 단정한 주거 틀 속에서 자라며 자연과 무방비로 닿는 경험 자체가 낯설고 불편했으며, 그 기억이 오랜 시간 굳어져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자연은 늘 아름다웠다. 봄밤의 벚꽃은 황홀했고, 여름 산에 오르면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 나무들 사이에서 마음이 한없이 높아졌다. 반면 선선한 가을 바람에는 잠시 마음을 눕힐 수 있었으며, 겨울에는 그런 자연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공원이 많은 호주의 잔디밭에 등을 깔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거나 책을 읽는 일은 나의 오랜 꿈이기도 하다. 자연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어려운 불편함 사이에서 늘 갈등해왔다.

 

그런 내게 수국이 찾아왔다. 작년 여름,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소소하게 홈가드닝을 하시는 상사께서 작은 수국 다발을 주신 것이었다. 꽃은 음료수병으로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겨왔다. 통영이나 제주에서 마주친 수국밭의 기억이 전부인 내게, 생활의 흔적을 묻힌 채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수국은 신비롭고도 어색한 풍경이었다. 그렇게 나와 수국의 반동거가 시작되었다.


 


1일차, 파랑새의 색을 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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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의 색은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달라진다. 산성이 높을수록 푸른빛, 알칼리성이 강할수록 보랏빛을 띤다. ‘변덕’이라는 꽃말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받은 수국은 파란색에 흰빛이 살짝 섞인, 시원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의 푸른빛이었다. 그 색이 너무 아름다워 일을 하다 말고 자꾸만 두 모니터 사이에 놓인 수국에 시선이 빼앗겼다. 멍 때린다는 좋은 표현이 있으니 불멍, 물멍, 모래멍처럼 꽃멍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꽃멍을 때리는 동안 나는 계속해 김춘수의 시 「꽃」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처럼 그 아름다움에 꼭맞는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색에 관해 내가 아는 표현은 너무 적었으며, 기호과 숫자로 구성된 색상코드조차 그 본질을 담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한참 뒤에야 나는 이름을 직접 붙여주고 싶은 더 적극적인 마음을 받아들였다.

 

내가 붙인 이름은 ‘파랑새의 색’. 내 마음 속 스테디셀러인 윤지영의 앨범 「Blue bird」의 커버에서 본 색과 닮아 있던 것이 계기가 됐다. ‘파랑새’라는 단어를 통해, 수국을 바라볼 때마다 바람이나 날갯짓, 자유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좋았다. 당시 나는 자유가 갖고 싶기도 했다. 세상의 기준들과 거리를 둘 자유, 감정을 솔직하게 느끼고 표현할 자유 같은 것. 그리고 초등학생 때처럼 순수한 호기심과 기쁨을 느끼며 매일 수국 관찰일지를 써내려갔던 꽃멍의 시간 자체가, 내가 바랐던 자유에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파랑새의 색을 한 수국’이라는 말에는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 좋았다.



 

2일차, 조금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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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의 꽃잎은 네 장이다. 상사께서 꽃잎 모양이 꼭 나비 같지 않냐고 말씀하신 뒤로는 파란 나비 이모지를 떠올리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네 장의 꽃잎이 정사각형으로 오밀조밀 맞아떨어지는 모양이 예쁘다고 느꼈다. 참, 바람개비를 연상하기도 했다. 수국이 언덕 위에 꽂힌 바람개비 떼처럼 팽팽 돌아가는 상상을 하니 어디선가 시원한 제주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푸른꽃들 사이에 낀 흰 수국은 목(木)수국이다. 목수국은 나무라서 조금 더 오래 산다고 한다.

 

어느 날엔 꽃이 생명이라는 당연한 사실 너머로, 꽃이 정말 숨을 쉬는 것 같다고 느꼈다. 수국과의 반동거가 시작된 뒤, 내 하루 일과는 늘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 일로 시작됐다. 매일 아침 병 속의 물은 반 뼘쯤 줄어 있었고, 물을 너무 좋아해서 이름에도 물 수(水) 자가 붙은 꽃이라는 걸 생각하며 깨끗하고 찬물을 새로 채워 넣었다. “시원하지? 맛있게 먹으렴.” 따위의 말을 걸기도 하면서.

 

또 수국은 약했다. 꽃을 들어올리거나 병을 옮길 때, 책상이 살짝 흔들리기만 해도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게 꼭 사람 같았다. 머리카락같이 몸에서 떨어져 나오는 작은 흔적들처럼, 수국도 자라고 달라지면서 그 변화를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잔해들을 정리하느라 떨어진 꽃잎과 가루들을 만져야 했고 그게 여전히 어려웠지만, 수국이 살아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내게 묘한 뿌듯함과 기쁨을 주었다.


 


3일차, 풍경이 달라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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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금요일, 수국을 병째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물을 따라내고 줄기를 타월로 감싼 뒤 다시 병에 꽂았다. 단단한 병을 쥐고 사무실을 나서 직장인 무리 사이로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여느 퇴근길과 다르지 않게 매일 지나던 골목을 걷고, 매일 타는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지만, 그날은 익숙한 풍경들마저 새로워 보였다. 네일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나와 수국의 모습이 살짝 부끄럽고, 또 살짝 기분 좋게 느껴진 덕에 원래도 근사한 금요일 퇴근길이 한층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유튜브를 틀거나 SNS 피드를 넘겼겠지만, 그날은 수국의 배경이 아스팔트에서 보도블럭으로, 횡단보도와 지하철역, 기차역으로 바뀌는 걸 눈으로 좇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국이 마침내 사무실을 벗어나, 조금은 더 자연에 가까운 자리로 나왔다는 게 실감났다. 햇살을 받았다가 그늘에 들면 색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바람이 불면 잎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에 나는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바람 맞으니까 어때?”, “햇살 좋지?” 또한 나 역시 그날의 공기와 온습도를 더 세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식물을 기르면 식물을 따라 주변 환경에 더 민감해지기도 하다던데 그 말이 조금은 와닿았다. 섬세해진다는 건 다정해진다는 것, 식물을 기른다는 건 어쩌면 조금 더 다정해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Epilogue. 꽃과 이름, 멈춰서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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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 제주에서 마주친 수국

 

 

10월이다. 여름은 지나갔지만, 가을엔 가을 들꽃이 핀다. 코스모스, 금계국, 루드베키아, 쑥부쟁이처럼 길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꽃들이다. 9월 16일 탄생화인 용담의 꽃말은 ‘슬픈 그대가 좋아’, 9월 20일 로즈마리는 ‘나를 생각해요’란 뜻을 가진다. 꽃말의 유래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지만, 그런 문장을 읽으면 꽃 사진을 한번쯤 찾아보게 된다.


또 양귀자의 『모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고 들국화라고 불러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작은 수국 다발에서 시작된 일이다. 처음으로 꽃의 이름을 자주, 그리고 애정을 담아 불러보게 된 것도, 그 이름을 통해 꽃들 앞에 한 번 더 멈춰서게 된 것도. 이 글이 누군가에게도 그런 첫 경험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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