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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시간이 된다면, 네가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느꼈으면 좋겠어 - 에스메 콰르텟 10주년 리사이틀 [공연]

겨우 네 명, 무려 네 명, 우리 네 명

by 장유진 에디터
2026.05.27 15:57

 

 

에스메 콰르텟


    

에스메 콰르텟.jpg


 

에스메 콰르텟이 6월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10주년 리사이틀을 연다. 공연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에스메’는 오래된 프랑스어로 ‘사랑받는’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라고 했다.

 

사랑받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다는 것. 이름의 뜻을 알고 나니 공연 프로그램보다 먼저 그 말부터 다시 보게 됐다.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은 드보르자크의 현악사중주 12번 Op.96 〈아메리칸〉,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 Op.110,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14번 D.810 〈죽음과 소녀〉다. 밝게 열리고, 깊이 가라앉고, 오래 어둠을 바라보는 세 곡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곡을 차례로 들어보려 휴대폰에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음악보다 먼저 밀려온 것은 지난 며칠의 일들이었다.

 

 

 

 

주말에는 유학을 앞둔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고, 연휴에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우리는 대단한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서로를 살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좋아할지, 무엇을 불편해하지 않을지, 무엇을 더 보고 싶어 할지 생각했다.


친구들과는 식물원에 갔다. 장미 정원과 온실, 예쁘게 나오는 사진들까지 좋은 것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나는 자꾸 곁에 없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가족과도 다시 와보고 싶었다. 많이 더우려나. 날씨를 보고 정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한낮을 거의 뙤약볕 아래에서 보내고 나서는 넷이서 주전부리를 사러 갔다. 밤새 놀 수 있을 것처럼 이것저것 골랐지만, 우리는 새벽 2시쯤 잠들었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서로 먹고 싶은 것을 묻고, 궁금한 것을 찾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내가 먹고 싶은 것보다 네가 먹고 싶은 게 궁금한 시간이 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보다 네가 보면 좋아할 것 같은 게 먼저 떠오르는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의 사랑은 거창한 고백보다는 작은 계산에 가깝다. 이건 먹을까. 저건 별로인가. 너무 단 건 싫어했나. 내일 일찍 가야 하는데 너무 늦게까지 붙잡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바쁘게 오간다.

 

드보르자크의 〈아메리칸〉을 틀어두고 있으니 먼저 떠오른 것은 밝고 넓은 풍경이었다. 장미 정원과 온실, 밤에 사러 간 주전부리, 오래 웃다가 늦게 잠든 얼굴들. 드보르자크를 듣고 있으니 그날의 시간이 조금 더 밝은 쪽으로 기울었다. 네 사람이 서로의 숨을 살피며 나아가는 현악사중주의 균형도, 우리가 서로를 살피던 마음과 조금 닮아 있다고 느꼈다.


이튿날 우리는 먼저 떠나는 친구를 배웅했다. 버스가 금방 출발해 긴 인사는 하지 못했지만, 창문 너머로 얼굴은 보았다. 짧은 배웅이 끝나고 나니 즐거웠던 시간이 한꺼번에 뒤로 물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슬픈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허전했다.


그 허전함이 남아 있는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곡을 틀었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장미 정원과 온실과 버스 창문을 떠올렸는데, 쇼스타코비치를 들으니 생각이 다른 쪽으로 갔다. 즐거웠던 시간 뒤에 남는 피로, 웃고 난 뒤의 조용함 같은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즐겁지만, 즐거움이 끝난 뒤에는 몸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나는 아직 그런 감정의 뒷정리에 서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앞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거대한 비극은 아니었다. 다만 즐거움이 지나간 뒤 조금 조용해지는 마음이었다. 어떤 곡은 틀어두는 것만으로도 내가 굳이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 감정의 뒷면을 비춘다.


그러고 보니 에스메 콰르텟은 현악사중주가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일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다고 했다. 작품 안의 감정과 서사를 관객에게 직접 전하고 싶었다는 말도 떠올랐다. 그 말은 어려운 음악을 쉽게 만든다는 뜻이라기보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던 감정을 지금 여기의 마음과 조금 가까이 놓아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 점에서 이번 10주년 리사이틀의 프로그램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세 곡은 모두 오래 사랑받아 온 현악사중주의 대표 레퍼토리이지만,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람이 견디고, 기억하고, 사랑하는 일을 비춘다.


그렇게 친구들과 보낸 시간이 지나고, 이번에는 엄마와의 하루가 이어졌다. 원래는 친구들과 갔던 식물원을 다시 가볼까 했지만, 날이 더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조금 더 멀리, 더운 날씨 속의 서울숲으로 갔다. 엄마가 가고 싶어 했다.


곳곳의 나무 아래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땡볕도 있었고, 흐린 순간도 있었고, 바람이 길게 부는 때도 있었다. 벤치에 자리가 나면 앉았고, 평상이 비어 있으면 다리를 뻗고 누웠다. 더운 날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잠깐씩 쉬어갈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었는데, 옆에서 신청곡이 들어와 한참 다른 노래를 들었다. 가수도 제목도 잘 몰랐지만, 검색하는 순간 익숙한 앨범 표지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가 떴다.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기억하지 못했지만 지나온 것들. 처음 보는 줄 알았는데 이미 한 번쯤 스쳤던 것들.


사람도, 장소도, 노래도 가끔 그런 식이다. 처음인 줄 알았는데 조금 익숙하고, 익숙한 줄 알았는데 또 새롭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를 틀었다. 한동안 누운 채로 음악을 듣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그날은 엄마의 생일이었고, 나는 케이크를 사러 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배도 부른데 케이크는 다음에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생일인데 그냥 넘어가기는 조금 아쉬웠다. 꼭 오늘 먹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안 해도 되는 일인데 안 하면 마음에 남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케이크를 샀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안 해도 되는 일을 굳이 하는 마음. 다음으로 미뤄도 되는 일을 오늘 하는 마음. 같은 노래를 몇 번이고 부르는 마음. 그런 것을 작게 모아놓으면, 그래도 사랑 비슷한 것이 되지 않을까. 삶과 죽음이 마주 앉아 있는 곡 옆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며칠을 보내고 나니 다시 오늘을 만났다. 방 안에 앉아 드보르자크, 쇼스타코비치, 슈베르트를 차례대로 들었다. 악보를 펼친 것도 아니고, 배경지식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눌렀고, 듣고 있었다.


음악 하나, 기억 하나를 끼워다 두니 지난 며칠이 조금씩 다시 이어졌다. 식물원, 장미 정원, 온실, 주전부리, 버스 창문, 서울숲, 신청곡, 케이크, 생일 축하 노래. 특별한 일들은 아닌데, 하나씩 천천히 떠올리다 보니 처음의 말도 되돌아왔다.

 

에스메. 사랑받는.

나는 그 이름을 다시 곱씹었다.

 

 

 

에스메 콰르텟 10주년 리사이틀


 

[포스터] 0602 에스메 콰르텟 리사이틀.jpg

 

 

에스메 콰르텟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10주년 리사이틀을 연다. 다시 보아도 이 프로그램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드보르자크의 〈아메리칸〉이 밝고 넓은 빛을 펼쳐 보인다면,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은 그 빛 뒤편에 남은 깊은 그림자를 비춘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는 끝내 피할 수 없는 어둠을 응시한다. 창단 10주년을 맞은 에스메 콰르텟이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소리와 호흡을 보여주기에 알맞은 프로그램처럼 느껴진다.


현악사중주는 네 명이 만드는 음악이다. 겨우 네 명. 그리고 무려 네 명.


무대 위에는 단 네 사람이 앉지만, 그 사이로 수많은 방향과 속도와 시간이 오간다. 한 사람이 먼저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이 듣고, 누군가는 그 위에 얹히고, 누군가는 조금 물러난다. 가까이서 보면 각자의 선이 있고, 멀리서 들으면 하나의 숨이 된다.


서울숲에서 오래 바라보았던 나무들을 떠올리면, 현악사중주도 조금 쉬워진다. 멀리서 보면 한 무리인데, 가까이서 보면 저마다 다른 키와 그림자와 흔들림을 가진 나무들. 같은 땅에 서 있지만 같은 모양으로 서 있지는 않은 것들. 바람이 불면 함께 흔들리지만, 같은 속도로 흔들리지는 않는 것들.


‘사랑받는’이라는 이름을 가진 네 사람이 한 무대에 앉는다.


그들은 서로의 소리를 듣고, 기다리고, 건네며 지난 10년의 시간을 현악사중주 안에 펼쳐놓을 것이다. 그날의 무대에는 세 곡의 음악과 에스메 콰르텟이 쌓아온 시간이 함께 놓일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된다면, 그날의 음악 안에서 네가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c)Alice Ahn (1).jpeg

 

 

[PROGRAM]


드보르자크_현악사중주 12번 Op.96 〈아메리칸〉 (27’)

I. Allegro ma non troppo

II. Lento

III. Molto vivace

IV. Finale: Vivace ma non troppo


쇼스타코비치_현악사중주 8번 Op.110 (22’)

I. Largo

II. Allegro molto

III. Allegretto

IV. Largo

V. Largo


INTERMISSION


슈베르트_현악사중주 14번 D.810 〈죽음과 소녀〉 (39’)

I. Allegro

II. Andante con moto

III. Scherzo

IV. Pr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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