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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폐현수막은 어디로 갔을까 - 패치 인류세 [도서]

『패치 인류세』로 읽는 버려진 물질의 이동과 쓰임

by 김민주 에디터
2026.10.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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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가에 걸린 현수막은 행사가 끝나면 어디로 갈까. 대부분은 소각되거나 매립될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한 미술가가 버려진 현수막을 들고 아시아 대륙을 건넜다. 현수막은 그곳에서 전혀 다른 사물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다시 보게 해준 책이 있다. 『패치 인류세』다.

       

       

       

      인류세, 그리고 '패치'


      '인류세(Anthropocene)'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을 크게 바꾸어 지질 시대를 새롭게 구분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공식 지질 시대 명칭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기후 변화와 생물 멸종, 플라스틱 오염 같은 문제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널리 쓰인다.

       

      애나 로웬하웁트 칭을 비롯한 저자들은 인류세의 변화가 지구 전체에 고르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본다. 댐과 운하, 대규모 농장, 하수도처럼 인간이 만든 시설이 있는 곳마다 서로 다른 변화가 일어난다. 그들은 고유한 환경과 역사가 얽힌 이런 장소를 조각보의 한 조각에 빗대어 '패치(patch)'라 부른다.

       

      또 다른 핵심어는 '이탈(feral)'이다. 본래 야생으로 돌아간 가축 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이 만든 환경에서 생겨나 인간의 계획과 통제를 벗어나 퍼져나가는 존재와 현상을 뜻한다. 하수도를 따라 번식하는 쥐나 운하를 뒤덮는 수초처럼 생물일 수도 있고, 환경에 퍼지는 방사성 물질처럼 생물이 아닌 물질일 수도 있다.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고 통제하려 해도 그 결과가 처음의 의도대로만 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페럴 아틀라스(Feral Atlas)'라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과학자와 역사가, 원주민 원로, 예술가 등이 쓴 79편의 현장 보고서를 지도와 이미지, 소리로 엮은 작업이다. 예술가 역시 현장을 기록하는 저자로 참여했다. 책을 읽는 동안 정재철의 작업이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현수막의 두 번째 삶


      2004년, 정재철은 국내에서 버려진 폐현수막 약 2천 장을 가지고 중국과 인도, 네팔을 거쳐 파키스탄까지 갔다. 아파트 분양과 학원 모집, 나이트클럽 홍보 문구가 적힌 천이었다. 그는 자유롭게 사용해도 좋다는 현지어 안내문과 함께 현수막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여섯 달 뒤 다시 찾아가 그 쓰임을 기록했다. 현수막은 사원과 시장 좌판의 햇빛 가리개가 되었고, 집의 커튼이나 모자와 옷으로도 쓰였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2011년까지 세 차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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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 2004, 아르코미술관

       

       

      이 작업은 재활용 미술로 소개되곤 한다. 그러나 현수막이 도착한 곳에서 무엇으로 쓰였는지 살펴보면, 단순히 폐기물을 재사용했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에서 광고에 쓰인 천은 현지의 기후와 생활 방식에 따라 햇빛을 가리는 천이 되거나 집 안을 가리는 커튼이 되었다. 물질의 쓰임은 처음 만들어진 목적에 고정되지 않았고, 새로운 장소에서 그곳의 필요와 만나 달라졌다.

       

      이 점은 『패치 인류세』가 말하는 패치와 닮아 있다. 같은 물질도 어떤 환경에 놓이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다만 현수막의 새로운 쓰임을 결정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인 주민들의 선택이었다. 이 작업은 버려진 물질의 행방이 처음 만든 사람의 의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그 물질의 다음 쓰임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역할도 보여준다.

       

       

       

      버린 곳과 쌓이는 곳

       

      2013년부터 정재철은 국내 해안으로 눈을 돌렸다. 〈블루오션 프로젝트〉에서 그는 신안과 제주, 새만금, 백령도 등의 해변을 돌며 병뚜껑과 어구, 그물, 장난감 같은 쓰레기를 모았다. 해류를 따라 쓰레기가 이동한 경로는 지도 형식의 드로잉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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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철, 〈제주일화도〉, 2019, 아르코미술관

       

       

      이 작업에서는 인간이 만든 물질이 사용을 마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도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은 해류를 타고 이동해 처음 버려진 곳과 멀리 떨어진 해안에 쌓인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생산되고 폐기된 물질이 그 의도와 무관하게 다른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이 도착한 장소뿐 아니라 그곳을 형성한 인프라와 역사도 함께 살펴보기를 권한다. 해변의 쓰레기는 해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생산과 소비, 수거와 처리의 체계가 그 이동에 관여한다. 폐기물을 만들어낸 곳과 그 결과를 감당하는 곳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정재철의 지도는 쓰레기가 도착한 장소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곳에 쌓인 물질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묻게 한다.

       

       

       

      re: 현장 기록


       

      『패치 인류세』의 저자들은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데이터만으로 환경 변화를 이해하려는 접근에 의문을 제기한다. 데이터는 변화의 규모를 보여주지만, 그 변화가 특정한 장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까지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일을 중요하게 다룬다.

       

      정재철은 현수막을 나누어준 뒤 여섯 달을 기다려 같은 장소로 돌아갔다. 무엇이 어떻게 쓰였는지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고, 이동 경로를 루트맵 드로잉으로 남겼다. 처음에는 현수막을 모두 거두어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주민들의 살림에 자리 잡은 물건을 다시 가져올 수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해안에서도 그는 쓰레기가 모이는 곳을 직접 걸으며 물질을 수집하고 그 흔적을 기록했다.


      현장으로 돌아가 관찰한 것을 기록하고 지도에 남긴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 방식은 『패치 인류세』가 중시하는 현장 연구와 닮아 있다. 두 작업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물질과 환경의 관계를 살피지만, 그 관계를 추상적인 설명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구체적인 장소에서 확인하려 한다.

       

       

       

      물질의 행방을 묻다


      『패치 인류세』는 개념어가 많고 논의가 촘촘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는 질문이 달라진다. 이 물질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시설과 경로를 거쳐 이곳에 도착했는가. 그 과정에서 누가 변화의 결과를 감당하는가.

       

      물론 정재철의 작업을 『패치 인류세』의 개념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수막의 재사용과 해양 쓰레기의 이동은 책에서 다루는 여러 현상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두 작업을 연결하는 이유는 개념을 작품에 대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이 제시하는 관점을 통해 정재철의 작업에서 물질의 이동과 장소의 관계, 현장 기록의 의미를 새롭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행사가 끝난 현수막은 버려진 뒤 그대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누군가의 그늘이 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 낯선 해안에 쌓이기도 한다. 『패치 인류세』는 거대한 환경 문제를 멀리서 바라보는 대신, 우리 주변의 장소와 물질에 남은 흔적에서 그 문제를 읽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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