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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우리는 왜 여전히 글을 쓸까? [문화 전반]

일기, 그리고 편지에서 발견한 글의 힘

by 오가영 에디터
2026.10.2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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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서부터 자기소개서까지, 인공지능에게 몇 가지 프롬프트만 입력하면 글의 초안을 받아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짧은 요청만으로도 긴 글을 얻어낼 수 있는 지금, 문장을 하나씩 써내려가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펜을 쥐고 종이 위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까.

       

      나는 일기와 편지를 좋아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곤 한다. 편지에는 평소 쑥스러워 꺼내지 못했던 말을 눌러 담는다. 무엇을 적을지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불쑥 떠오르고, 내가 전하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씩 분명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느껴온 글의 힘은, 이렇듯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일기: 마음의 안전지대


       

      오래된 일기장을 펼치면, 그 안에 가득 적힌 문장보다도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이 있다. 페이지 사이에 남아 있는 '향기'다. 나는 선물로 받은 향수를 일기를 쓸 때마다 종이 위에 뿌리곤 했다. 시간이 흐른 뒤 일기장을 펼쳤을 때, 그 향은 지난날 써내려간 일기를 읽기도 전에 나를 그 시절로 데려다주었다. 잠들기 전 작은 조명 아래에서 하루동안 느낀 감정을 기록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일기를 쓰는 일에 많이 의지했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공부에 대한 압박과 인간관계에서의 불안감이 겹쳐 마음을 편히 놓기가 어렵던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늘 혼자인 것만 같았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쉽게 흔들리곤 했다. 어디에든 털어놓고 싶었지만,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는 감정들이 계속해서 쌓이곤 했다.

       

      그럴 때면 일기장을 펼쳤다. 서운했던 일과 미웠던 사람,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순간까지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을 잔뜩 적었다. 아끼던 펜을 들고 매끄럽지 못한 문장들을 정신없이 써내려갔다. 그 순간만큼은 그날 느낀 모든 감정들을 마음껏 꺼내놓을 수 있었다. 쓰다 보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속상했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고, 그저 하고 싶었던 말을 글로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내 하루를 버텨 줄 일기장에는

       

      또 무엇을 담을까

       
      - 리도어, 〈사랑의 미학〉 중
        

       

      이 가사를 들을 때면 일기장에 기대어 보내던 날들이 떠오른다. 한참을 적고 나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종이 위로 옮겨간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일기장을 덮곤 했다.

       

       

       

      '그 시절의 나'를 다시 읽기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 문보영, 『일기시대』 중

           

       

      이 문장을 떠올리면, 그 일기장의 주인이 꼭 타인만이 아니라 ‘과거의 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일기에는 지금 읽으면 부끄러운 문장들이 있다. 친구를 향해 지나치게 날을 세운 말이나 사소한 일을 크게 받아들였던 흔적을 보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생각했을까?’싶다. 그 시절의 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문장 앞뒤에 적힌 말들을 읽다 보면 마음이 달라진다. 당시의 나는 무엇을 불안해했고, 어떤 말에 상처받았으며, 누구에게 기대고 싶었는지가 나란히 적혀 있기 때문이다. 몇 줄의 날 선 말 옆에는, 그 말을 적기까지 겪었던 것들이 남아 있다. 그렇게 읽다 보면 그때의 나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 시절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마음을, 시간이 흐른 뒤의 내가 다시 읽어주는 셈이다.

       

       

       

      편지: 누군가를 떠올리며


       

      일기장에는 내 마음을 문장으로 펼쳐놓았다면, 편지지 앞에서는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일, 고마웠던 순간, 평소에는 쑥스러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생각한다. 정성들여 문장을 고르는 동안, 그간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평소 얼굴을 마주보며 하는 대화에서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가볍게 웃어 넘길 때가 있다. 그러나 글로 풀어쓰는 편지에는 왜 고마웠는지 그 이유까지 조금 더 길게 적을 수 있다. 상대가 했던 말이 내게 어떤 위로가 되었는지,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어낸다. 얼굴을 마주하고는 낯간지러워 삼켰을 말도, 종이 위에서는 끝까지 써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편지는 쓰는 기쁨뿐 아니라 받는 기쁨도 크다. 편지를 읽으면,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하며 문장을 골랐을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필체로 적힌 문장은 그 사람을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전하지 못한 말도 적어두기


       

      모든 편지가 상대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해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쓰게 되는 편지가 있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넘칠 수 있다. 고마웠다는 말, 서운했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때. 그럴 때 우리는 편지를 쓸 수 있다.

       

      김은지의 시 「초여름」의 화자는 세 장이나 편지를 쓴 뒤, 세수를 하다가 그 편지를 주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편지라는 건

      안 줄 수가 있구나


      이렇게 실컷


      말 걸어놓고도
       

       

      이 발견에 기뻐한 화자는 냉장고에서 썰어놓은 수박을 꺼내 먹는다. 상대에게 실컷 말을 건넨 뒤, 편지는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이미 그 사람에게 하고싶은 말을 한참 건넨 셈이다.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문장으로 옮겨적고, 적으면서 또 다른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꺼내놓으면 마음이 조금 후련해진다.

       

      여기서 편지와 일기는 공통점을 가진다. 어디에도 꺼내지 못했던 마음을 글로써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나 자신조차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던 마음도, 일단 문장으로 옮겨본다. 그러다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아팠는지,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조금씩 알 수 있게 된다.

       

      클릭 한 번으로 손쉽게 글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도, 나는 펜을 들고 직접 문장을 써내려가는 시간을 좋아한다. 글로 감정을 풀어내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고르며 그 사람을 생각하고, 오래 전에 쓴 문장을 읽으며 과거의 나를 돌아본다. 내가 느낀 글의 힘은 그러한 순간들에 있다.

       

      앞으로도 자주 일기장에 하루를 받아쓰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편지를 쓰고 싶다. 그렇게 적어둔 글이 내게는 마음을 놓을 곳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말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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