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국제 영화제에 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은 조금 새로운 영화를 보려고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것이 퀴어와 호러는 난생 처음 보는 조합이지 않나. 영화가 시작된다는 말을 끝으로 장장 두 시간에 걸친 기다림 끝에 온 답은 놀란 얼굴이 허둥지둥 거리고 있는 이모티콘 뿐이었다.
레위기가 부천 국제 영화제의 관객 투표상인 ‘부천 초이스 월드’ 장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기대감과 궁금증이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스릴러와 호러를 원체 좋아하는 나로서는 보지 않을 이유가 없는 영화였다. 한창 인기있던 영화 <옵세션>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망설이지 않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장르적 상상력과 결합시킨다. <레위기 (Leviticus, 2026>은 퀴어를 소재로 이야기하는 종교주의와 호러를 결합한 영화이자, 그러한 시도의 정점에 선 작품이다. 엄격한 종교적 율법과 보수적인 사상이 지배하는 외딴 마을, 그 속에서 시작된 나임과 라이언의 사랑은 그 자체로 세상에 금기에 도전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상 속에서 단단해진 마을은 이를 순수한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둘의 사랑을 죄악이자 치유해야 하는 질병으로 명명한다. 영화는 겉보기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괴물로 나타난다는 기괴한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맹목적인 신념이 타인의 존재를 어떻게 말살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모종의 사건을 겪은 나임과 라이언의 사랑이 탄로나며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이를 삿된 마음이나 질병으로 취급했고, 결국 둘은 치유의 의식을 받게 된다. 그 이후로부터 나임과 라이언은 서로의 모습을 한 괴물을 보게 된다.
나임과 라이언은 괴물에게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행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두려워하고, 서로에게서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임과 라이언은 서로의 모습을 한 괴물을 만나며 공포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레위기>는 먼저 신념과 보호라는 허울 좋은 명복 아래 자행되는 폭력을 다룬다. 영화의 제목 ‘레위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엄격한 금기과 율법을 다루는 구절이다. 마을의 어른들, 특히 나임의 어머니인 알린을 비롯한 마을의 구성원들은 소년들을 파괴하려는 악의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이 기괴한 치유의 의식이 아이들을 구원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거룩한 의무라고 믿는다. 하지만 악마가 악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듯, 가장 순수한 선의와 맹목적인 신앙 역시 잔인한 폭력으로 변질된다. 타인의 존재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율법주의와 종교적 극단주의는 결국 가장 어린 영혼들을 부순다.
영화는 그 억압이 한 사람의 내면에 스며드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일반적인 호러 영화의 괴물은 기괴한 형체를 하고 있는 외부의 낯선 적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이 영화 속 괴물은 하필이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있다. 눈 앞의 대상이 나를 사랑하던 연인인지, 아니면 나를 파괴하려는 환영이자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 두 소년은 극심한 심리적 고립을 겪는다.
가장 진실하고 소중한 감정마저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억압적인 환경에서, 마을은 두 소년에게 자신이 느끼는 사랑이 사실은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외적인 폭력이나 물리적인 억압이 아닌 개인의 내면에 의심을 심어두는 방법은 결국 사람을 죽음의 벼랑까지 밀어넣는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공포와 억압속에서 소년들이 찾은 해답은 무엇일까? 영화의 결말은 눈부시게 찬란하거나 완벽한 해방을 약속하지 않는다. 소년들은 마침내 마을을 떠나는 버스에 오르지만, 그들을 괴롭히던 괴물과 상처의 흔적은 계속해서 남아있다. 고통받았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두려움은 여전히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함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세상의 혐오와 내면의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완벽한 세상이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상처입고 불완전할지라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삶을 선택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자 연대의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기>는 결코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씁쓸함은 과연 무엇이 진짜 ‘죄악’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씻지 못할 해악을 끼치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널리고 널린 세상이다.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죽이고 약한 자들을 속이며 이득을 취한다. 그렇다면 두 소년이 서로를 향해 품은 감정은 어째서 가혹한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레위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거창한 단죄나 율법의 칼날이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 곁에 기꺼이 머무는 존재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서로를 믿고 대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감정이란 편한 대로 대충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존중하며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세상이 정한 낡은 잣대에 갇혀 사랑을 심판하는 대신, 서로를 온전히 품고 지켜내는 것. 상처 입고 불안정할지라도 두려움을 안고 기꺼이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그 발걸음이야말로, 차가운 율법을 넘어선 진정한 구원임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