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규어 다이어트. 어찌 보면 괴상한 두 단어의 조합 속에는 재미있는 뜻이 숨어있다. 바로 식비를 줄여 피규어를 구매하겠다는 뜻. 가볍게는 한 끼 밥값부터 시작해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피규어의 가격을 겨냥한 재밌는 말장난이다.
다른 것을 참아가면서까지 피규어를 구매하겠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피규어 다이어트’를 선언하겠다. 누구나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조차 없이 버티기엔 삶은 너무 지루하다. 반복되는 하루 속 무슨 재미로 살아가냐 묻는다면, 나의 경우에는 피규어를 수집하는 재미로 삶에 변주를 주는 편이라고 대답하겠다.
수많은 이들의 팬심이 만들어낸 피규어의 세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다. 한 뼘 정도의 귀여운 피규어부터, 실제 인간처럼 디테일 하나 하나를 살려낸 피규어까지. 제작사와 시리즈 명만 읊는다고 해도 한나절이 걸릴 것이다. 반프레스토나 세가처럼 대중적인 제작사는 물론,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넨도로이드처럼 브랜드와 시리즈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징이 피규어의 세계를 더 다채롭게 만든다.
오늘은 조금 독특한 피규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흔히 ‘피규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앉아있는 자세를 한 착석형 피규어다. 일반적인 피규어에 비해 배치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현실감 넘치는 자세가 주는 매력은 수집가들의 지갑을 강탈할 준비가 되어있다. 끝없이 펼쳐진 피규어의 세계 속에서, 덕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피규어는 과연 무엇일까?
후류 누들스토퍼
누들스토퍼는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제작사 후류의 시그니처 피규어로, 앉아있는 듯한 독특한 자세를 하고 있다. 이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컵라면을 누르는 ‘문진’의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캐릭터를 펄펄 끓는 물 컵라면 위에 올려두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실제로 누들스토퍼는 콘셉츄얼한 용도와는 다르게 책장이나 선반 등 일상적인 장소에 배치하기 용이한 조형으로 인해 인테리어나 전시용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더해 2만원 대의 저렴한 가격대와 가성비 넘치는 싱크로율까지 선보이는 누들스토퍼는 인기 만화부터 미소녀까지, 다양한 라인업과 시리즈로 덕후의 수집 욕구를 자극한다.
메가하우스 G.E.M 테노히라
테노히라(てのひら)는 ‘손바닥’이라는 뜻을 가진 피규어로, ‘손바닥 위에 올릴 수 있는 피규어’를 의미한다. 피규어의 이름처럼 대부분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문진 형태로 제작된 누들스토퍼와 달리 다리를 펼치거나 비스듬히 누워있다는 특이점이 있다.
또한 8만원 대로 구성된 비교적 고가의 가격대로 채색 상태나 디테일이 상당히 좋은 편인데, 특히 피규어 구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얼굴 조형이 뛰어나다. 실제 작품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손 위에서 두고두고 볼 수 있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다만, 테노히라 시리즈는 인기에 비해 매물이 적어 예약 판매 이후에는 정가 구매가 어렵기에, 원하는 캐릭터가 눈에 띈다면 ‘피규어 다이어트’를 각오하는 편이 좋다.
타이토 데스크톱 큐트
타이토 데스크톱 큐트는 일본의 비디오 게임 제작사 타이토에서 제작하는 경품 피규어 시리즈로, 책상이나 모니터 받침대를 장식할 수 있는 피규어를 의미한다. 특히 ‘데스크톱 큐트’시리즈와 ‘플로트 아쿠아 걸’ 시리즈는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중심으로 제작되며, 화려한 색감과 디테일은 마치 작품 속 캐릭터가 눈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데스크톱 큐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타이토 피규어는 2~3만원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경품 피규어임에도 불구하고 최상급의 조형을 자랑하며 ‘가성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만화나 캐릭터를 잘 알지 못해도, 피규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장식품이 된다. 데스크톱 큐트 시리즈는 단순한 팬심을 넘어, 누구에게나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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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애니메이션의 발전과 수요가 상승세를 기록하며, 재판매 및 신규 모델 발매 등 피규어 업계 역시 활기를 띠고 있다. 국내 일본 여행객들 사이 덕질 여행이라는 뜻의 '오타쿠 루트'가 생겼고, 국내 피규어샵과 가챠삽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인기에 종종 '프리미엄' 가격이 붙은 피규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은 피규어의 매력! 작품을 통해 유대감을 쌓은 '최애 캐릭터'를 내 손 안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라도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덕후의 마음'이지 않을까.
지지대나 받침대가 있어야만 설 수 있는 캐릭터, 혹은 어딘가 뻣뻣하게 서 있는 캐릭터보다 현실감 있게 '앉아있는' 피규어가 좋다. 장식장 속이 아닌 일상 곳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캐릭터는 곧 하나의 즐거움이 된다. 그렇기에 멈출 수 없는 피규어 사랑은 오늘도 나를 '피규어 다이어터'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