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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줄거리와 도상으로 읽어보는 비극의 서막
율법과 금기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거룩함'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 숨은 정결에 대한 집착은 어떻게 타인의 삶을 바닥부터 무너뜨리는가. 애드리언 키아렐라(Adrian Chiarella) 감독의 《레위기》는 이 물음을 성경에서 정결과 금기의 규정이 가장 촘촘한 레위기에서 빌려온다. 폐쇄적인 종교 공동체 안에서 싹튼 십대 소년들의 사랑과 정체성이 어떻게 초자연적인 공포로 변질되어 가는 서늘한 이야기들이 퀴어 호러 멜로로 다시 태어난다.
이야기는 아버지를 잃은 소년 나임이 어머니와 함께 독실한 신앙이 지배하는 외딴 시골 마을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나임은 마을 소년 라이언과 금기시된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라이언이 목사의 아들 헌터와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한 나임은 질투에 사로잡혀 두 사람의 관계를 헌터의 부모에게 알려 버린다. 교회는 라이언과 헌터를 강압적인 '치유 의식'으로 이끌고, 참혹한 의식이 끝난 직후 두 소년 곁에 정체 모를 존재가 나타난다. 이 괴물은 기이하게도 '자신이 가장 열망하는 상대의 형상'을 하고서 소년들의 목을 죄어 온다. 이윽고 나임 역시 같은 저주의 다음 표적이 되며 본격적인 비극이 도래한다.
영화의 이 비극은 여러 도상으로 먼저 예고된다. 영화 초반부에서 뱀이 개구리를 살피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도상에서 뱀은 유혹과 죽음, 배신과 유죄를 상징하고, 개구리는 탈바꿈이라는 생태 때문에 성장과 성장통, 나아가 부활을 연상시킨다. 뱀이 개구리를 삼키는 장면은 위험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선언처럼 읽힌다. 어떤 욕망에서 비롯된 배신과 죽음이 이제 막 자라나려는 소년들의 성장통을 덮치리라는 예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도상을 라이언과 헌터의 구원 치료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원치료사의 이른바 '치료'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동안, 집의 다른 한편에서는 검은 염소의 형상을 한 퍼즐이 맞춰지고 있다. 염소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공식적인 제물이면서, 양과 대비되어 불의하고 심판받는 자를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하다. 종교적 규율을 따르지 않은 소년들이 형언할 수 없는 존재에게 제물로 바쳐지리라는 불길한 미래가 여기에 겹쳐진다. 한편 염소는 판(Pan)이나 사티로스 같은 욕망의 신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억눌린 욕망은 결국 수면 위로 떠오르리라는 것을 영화는 이 도상으로 미리 말해 둔다.
영화는 세 겹의 결로 읽을 수 있다. 금기와 욕망, 공포와 두려움, 믿음과 사랑이다. 아래에서는 가장 먼저 어긋나기 시작하는 믿음에서 출발해 금기와 욕망, 두려움을 차례로 지나, 마지막으로 이 흐름을 영화가 장르적으로 풀어낸 문법을 보려 한다.
2. 믿음은 어쩌면 꽤나 자주 어긋난다
영화 속 어른들은 신앙이 투철하다. 헌터의 아버지와 나임의 어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 곧 종교라는 무형의 존재를 의심 없이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이상하리만치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신은 믿으면서,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아들과 가족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 불균형은 나임의 어머니가 건네는 대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들에게는 "보여줄 수 있어?"라며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하면서, 신에 대해서는 "너도 보이지 않는 걸 믿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신 앞에서는 증거 없는 믿음이 미덕이지만, 아들 앞에서는 증거 없는 믿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 모순은 믿음이 얼마나 치우쳐 있는지, 그리고 '믿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통제의 언어로 바뀌는지를 보여 준다.
어긋나는 쪽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비극의 발단에는 서로를 향한 불신이 서 있었다. 나임은 라이언이 헌터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본 뒤 질투에 휩싸여 사랑하는 이의 비밀을 어른들에게 털어놓는다. 사랑이 가장 먼저 더 이상 상대를 믿을 수 없다는 배덕감에서 출발하는, 배신으로 번지는 순간이다. 결국 괴물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로 나타나면서, 두 소년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균열이 생기고, 영화는 그 균열을 끝까지 메우지 않는다.
3. 집단적 금기와 종교적 도상
영화의 제목인 '레위기'는 구약성경에서 거룩과 정결, 제사 제도를 규정한 율법서다. 남성 간의 성관계를 금하는 구절이 오랫동안 동성애를 정죄하는 근거로 호출되어 왔고, 제목은 그 역사를 곧바로 끌어온다. 레위기는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와, 짐승을 대신 바쳐 죄를 속하는 제사를 세밀하게 규정한다. 이 제사를 집행하는 이들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데, 이들 역시 죄와 한계를 지닌 인간이다. 대제사장 아론조차 먼저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고, 기독교 신학은 이를 근거로 인간 제사장이 과연 누구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져 왔다. 영화가 이 논쟁을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죄를 가려내고 처벌하는 자리에 선 인간의 불완전함이라는 질문은 배경에 깔려 있다.

그 질문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곳이 16장의 '희생양(scapegoat)'이다. 속죄일 규례에는 염소 두 마리가 등장한다. 한 마리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고, 다른 한 마리는 온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채 광야의 아사셀에게 보내진다. 영화 속 공동체는 금기를 어긴 소년들을 바로 이 희생양으로 삼는다. 마을의 순결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황량한 고립 속으로 내모는 것이다. 어쩌면 앞서 언급된 염소의 도상이 이 비극적 구조를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정결을 위해 누군가를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논리, 그것이 레위기의 오래된 문법이자 영화가 비추는 공동체의 얼굴이다.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종교적 도상은 '불'이다.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여호와 앞에 드렸다가, 불이 나와 그들을 삼키는 벌을 받는다. 공동체의 눈에 소년들의 사랑은 바로 이 허락받지 못한 불이다. 그러나 영화는 불을 한 방향으로만 읽지 않는다. 한쪽에는 죄를 심판하고 정화하려는 공동체의 불이 있고, 다른 쪽에는 서로를 태우는 열정의 불이 있다. 같은 불꽃이 하나는 처벌의 도구로, 다른 하나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감각으로 쓰이는 셈이다.
결국 불꽃 같은 욕망과 사랑이 소년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 밑바닥에는 스스로를 악하다고 규정하게 만드는 교회의 억압과, 그 억압이 내면화된 수치심과 죄의식이 놓여 있다. 동성애, 금기, 죄의식. 영화는 이 세 단어가 서로를 물고 도는 굴레를 호러라는 형식으로 눈앞에 꺼내 놓는다.
4. 서로의 얼굴로 나타난 공포,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
영화는 아주 영리하게 괴물을 디자인하였다. 소년들이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서로를 탐하고, 원하게 될수록 그 존재는 더 짙어진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공포도 깊어지는 구조다. 욕망하는 대상이 곧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이 역설 안에서, 소년들의 감정은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어긋난다.

믿음이 어긋나듯 공포도 어긋난다. 우리는 각자의 공포가 맞물렸다가 비껴가는 여정을 따라간다. 나임에게 공포는 사랑하는 이가 두려움의 얼굴로 떠오르는 일이자, 자신의 폭로가 모든 것을 시작했다는 죄의식이다. 라이언의 두려움도 이와 닮았지만, 여기에 나임이 곁을 떠나 이 공포를 혼자 감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유기의 불안이 하나 더 얹힌다. 나임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괴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금기를 어겨 소속을 빼앗기는 일이다. 같은 사건 앞에서 서로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들이 한 화면 안에서 엇갈릴 때, 이 영화의 공포는 괴물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균열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이처럼 영화는 금기를 깨트린 이들을 향한 종교 공동체의 가혹한 압박,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내면에서 뜨겁게 불붙는 욕망과 지독한 죄의식의 교차를 '저주와도 같은 괴물의 탄생'이라는 은유로 번역해 낸다. 공동체가 강요하는 수치심이 소년들의 마음속 깊이 내면화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들이 가장 갈망하는 상대의 형상을 한 기괴한 환영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을 쫓는 초자연적 존재는 단순한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엄격한 율법이라는 틀과 이를 뛰어넘으려는 원초적 열망이 충돌하며 빚어낸 내면적 죄의식의 실체화인 셈이다.
5. 공포와 멜로, 공존할 수 있는가

공포와 멜로는 분명 결합하기 쉬운 요소들은 아니다. 예측 불가함에 대한 위협과 불안을 유도하는 공포와, 존재 간의 감정적 교감과 친밀함을 쌓아가는 멜로는 다소 대척점에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까다로운 결합에 대해, 영화는 공포의 대상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그 어려움을 돌파한다. 공포의 대상과 애정의 대상을 중첩시키고, 한 대상에 대한 상충된 인식과 감정을 대비시킨다. 이 고조되는 이질적 감각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공포를 마주한다.
여느 공포영화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공포를 이겨낸다는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가족은 믿어 주지 않고, 연인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존재로 나타난다. 안전지대라 할 만한 여백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사랑의 근간인 믿음을 부수어 뿌리부터 흔드는 공포, 이것이 영화가 멜로와 호러를 한 몸으로 엮는 방식이다. 이 대목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옵세션》과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내가 사랑하고 가장 욕망했던 대상이 위험 요소로 변질된다는 메커니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다만 《레위기》의 불신은 일방적이지 않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양방향으로 두려움을 품기 때문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은 한 겹 더 두터워진다.
영화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나임과 라이언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선과 둘 사이의 서사가 더 단단했다면, 사랑이 공포로 뒤집히는 낙차는 훨씬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종교 공동체가 가하는 압박과,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도 더 깊이 그려졌다면, 기존의 서사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단단한 토대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제목이 책 한 권을 통째로 가져왔음에도 신학적 논의는 얕다는 해외 평단의 지적 역시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질문을 떠받치는 인물과 공동체가 조금 더 두텁게 쌓여야 했다.
6. 결국 그들은 떠난다
영화의 끝에서 소년들은 마을을 떠난다. 이들은 사랑의 도주를 하는 것일까. 실상은 울타리에서 쫓겨난 양들과도 같다고 보인다. 서로를 믿지 못하던 소년들이 가족과 공동체 모두에게 버려지고 내몰린 끝에 서로만을 믿게 된다는 결말은 희극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하다. 이 아이러니한 결말이 《레위기》를 호러 멜로라는 장르 위에 올려놓는다.
소년들은 공동체의 희생양으로 몰리고, 그들이 노출되는 거친 자연과 황량한 풍경은 거대한 법전 아래 무력하게 버려진 인간의 외로움을 상징한다. 레위기의 희생양이 광야로 보내졌듯 소년들도 광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이들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서로뿐이다.
누군가를 정결하게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밖으로 내모는 믿음은 과연 거룩한가. 영화는 묻되, 쉽게 답하지 않는다. 다만 공동체가 지키려 했던 '순결'의 이름으로 부서진 것이 두 소년의 삶이었다는 사실만은 오래도록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