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자기소개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일이었다.
새 학기마다 돌아오는 '나'를 소개하는 시간은 늘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아는 얼굴 몇 명, 낯선 얼굴 여러 명 있는 반 친구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은 임혜인이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잘 부탁해."라는 말을 한다. 늘 이런 식으로 끝났다. 말은 늘 흐트러지고 시선은 피하고 싶고 마음은 도망가고 싶던 시간이었다.
2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자기소개는 여전히 쉽지 않다.
특히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합격을 위해 '나를 포장하는 일' 같아서 더 벅차고 힘겹게 느껴진다. 때로는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래서일까 오히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새로운 만남을 위한 자기소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아직도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떨리고 정작 나도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한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그냥 소개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흔하고 이제는 지겹기도 한 'MBTI 네 글자'의 도움을 빌려보려 한다.
물론 이 네 글자로 사람을 단정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 역시 조심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나를 설명하는 작은 실마리처럼 느껴지기에 이번만은 이 네 글자를 가져와 본다.
그래서 아주 빤한 질문이지만 이렇게 시작해 본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INFP입니다.

I - 혼자가 좋지만 사람도 좋아합니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다. 말을 꺼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는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도 듣는 게 좋다.
몇 달 전, 초중고 학교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내 생활기록부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 안에는 빠짐없이 이런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조용함", "소극적", "내성적".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시간을 좋아했고 몇몇 가까운 친구들과 지내는 것이 익숙했다.
사실 그때는 혼자인 시간이 싫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 속에 섞이는 건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 사이에서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혼밥, 혼술, 혼여행. 혼자서도 괜찮은 시대라서인지 이런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특히 몇 년 전부터 혼자 국내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나만의 속도로 정해진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러다 보면 혼자 여행 온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순간도 생긴다.

기억에 남는 일은 부산 여행에서 아쿠아리움에 갔을 때, 나처럼 혼자 여행하던 분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가 어느새 함께 아쿠아리움을 끝까지 돌아다니며 서로의 모습을 담아준 적이 있다. 잠깐이지만 새로운 만남이 생기는 순간, 그 짧은 만남이 혼자 여행의 묘미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싫은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오히려 가끔은 외로움 때문에 혹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은 더욱 소중하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별일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관계들 말이다.
그리고 취미와 마음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림 모임이나 독서 모임에도 나간다. 유령 회원이라 모임에 잘 안 나가기도 하지만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N - 상상이지만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릴 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책의 주인공을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이나 '책에 들어간 나의 이야기' 적는 과제가 가끔 있었다. 나는 그런 과제를 유난히 좋아했다. 상상 속 세계로 들어가 나만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 재미있었다.
지금도 상상하는 일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뮤지컬, 애니메이션, 웹툰, 드라마… 이야기가 있는 모든 콘텐츠를 정말 좋아하며 자연스럽게 그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예를 들면 나는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를 좋아하는데 가끔 짱구가 사는 떡잎 마을의 주민이 되어 걱정 없이 사는 상상을 한다. 특유의 평화로운 배경 음악과 얼렁뚱땅한 하루가 이어지는 그 세계에서는 미래를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다.
뮤지컬 <레드북>의 주인공 안나가 슬플 때 야한 상상을 하며 버텼듯이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상상의 숨을 쉰다. 불안한 미래가 밀려올 때마다 이렇게 생각의 방향을 바꾸며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본다.
그러나 언제나 무한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다. 희망적인 상상보다 불안한 현실과 미래를 자주 생각하며 가끔은 머리가 굳어지는 느낌도 든다. 그래도 상상만은 멈추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언젠가 이루고 싶은 미래는 모두 '상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 집을 마련해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은 꿈, 해외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이 모든 상상이 오늘의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런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언젠가 꼭 맞이하고 싶다.
F - 눈물이 많은데 그래서 예술이 좋아요.
나는 정말 잘 우는 편인데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유치원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은 신나게 노는데 나만 구석에서 이유도 모른 채 울고 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눈물이 많았을까?’ 싶지만 그때부터 감정이 조금만 흔들려도 금세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화가 나도 눈물이 먼저 나오고 슬프면 금방 울컥하고 심지어 너무 행복해도 눈물이 난다. 놀이공원에서 퍼레이드를 보다 반짝이는 조명만 봐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영화나 뮤지컬의 한 장면이 마음을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고인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감정을 건드리는 것들에 유난히 끌린다. 뮤지컬, 영화, 전시, 음악처럼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예술을 보면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문화예술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감정을 깊게 느끼는 일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고 그 감정들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P - 즉흥적이지만 그래야지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되어요.
나는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다. 생각보다 더 즉흥적이고 마음이 향하는 순간을 따라가는 편이다. 사실 그래야지 걱정 없이 바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즉흥적이었던 결정은 고등학교 선택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입시설명회에서 도예를 배우는 학교를 알게 되었다. 집과의 거리가 좀 있었고 갑작스러운 입시 시험도 준비해야 했지만, 현실적인 조건보다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 하나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때 친구들이 다들 놀랐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선택은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졌다. 도자기가 맞지 않은 것 같아서 대학 입시 때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시절, 문득 "디자인 한번 해볼까?"라는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재수하려다 말고 디자인을 배우며 첫 취업도 디자인 회사로 시작했다.
하지만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벅차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게 내가 문화예술 쪽으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의 시작이었다.
재작년 살고 있는 경기도에서 서울에 있는 디자인 회사로 출퇴근하던 시절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본 청년 축제 기획단 모집 전단 보았다. 그리고 내 발걸음을 축제 및 문화 기획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다. 또 우연히 검색해서 발견한 인턴십 프로그램 덕분에 공연 관련 회사를 만났고, 그곳에서 인턴으로 근무해 보며 문화예술이라는 분야에 더욱 한 발짝 다가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나는 자주 길을 잃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길을 찾기도 한다. 즉흥적인 선택들이 결국 나를 하고 싶은 일에 가까워지게 만들고 있었다.

INFP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같았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네 글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나'가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이 네 글자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나를 조금은 더 솔직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내향적이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상상 속에서 자주 머물지만 현실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감정에 흔들리지만, 그 감정으로 세상을 깊게 느끼고, 즉흥적이지만 그 즉흥이 나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아직도 자기소개는 어렵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임혜인입니다. 그리고 저는 계속 '나'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