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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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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그녀는 나에게 가장 깊은 대화 상대다. 예술과 철학, 사람의 본질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했고,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각자 성장을 자극시켰다. 그런 그녀가 최근 오랜 시간 붙들어온 미술을 잠시 내려놓고 연기의 길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히 전공을 바꾼 선택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다시 구성되는 과정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그녀가 예술가로서 경험한 순간들, 그 안에서 생겨난 균열들, 그리고 그 균열을 어떻게 새로운 움직임으로 바꾸어가고 있는지를 듣기 위해 마련되었다.

 

*

 

Q. 미술을 그만두고 연기로 진로를 바꿨다고 들었다. 최근 자신에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이라고 느끼는가.

 

미술을 그만둔 뒤 가장 달라진 점은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하려는 경직성이 줄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작업물 중심의 사고관을 갖고 있었어요. 결과물의 완성도, 형태의 정확성, 기술적 견고함. 그런 기준에 스스로를 가두곤 했어요. 미술을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시야가 넓어졌어요. 상황·감정 중심의 사고로 옮겨갔죠. 뭔가를 만들기 위해 나를 조이지 않고,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는지를 먼저 듣게 됐어요. 저는 미술을 ‘버린 것’이 아니라, ‘나의 방식을 더 잘 보기 위해 잠시 손을 뗀 것’에 가깝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가장 본래적이고 원초적인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어요.

 

 

Q. 요즘 연기를 하거나 생활 속에서 자주 떠올리는 장면이나 이미지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요즘 머릿속에 가장 자주 떠오르는 단어는 ‘자극’이에요. 그런데 그 자극은 단순히 강한 충격이나 감정적 요동을 뜻하는 말이 아니에요. ‘균열이 생기는 지점’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아요. 저는 완전히 무너졌을 때보다, 무너지기 직전에 더 크게 반응해요. 저를 움직이게 되는 순간들이 대부분 그 ‘미세한 이상 신호’를 감지했을 때였다는 걸 최근 들어 깨달았어요. 어떤 관계든, 작업이든, 연기든, 그 내부에서 긴장이 조금만 생기면 바로 알아차리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피하거나 피로해하는 순간에 오히려 더 집중하게 되고 그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요.

 

근데 이런 게 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래부터 몸이 그렇게 작동해 왔던 거 같아요. 정적인 상태에서는 쉽게 무뎌지고,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감각이 또렷해져요. 그래서 ‘균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그 지점이 오히려 방향을 바꾸는 신호가 되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한다는 걸 이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Q. 최근 본인을 가장 크게 흔들었거나 움직이게 만든 감정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켰는가.

 

최근 가장 강하게 움직인 감정은 ‘긴장감’이에요. 그 감정이 크게 느껴졌던 순간은 감독님 앞에서 연기를 보여주러 가는 시간이었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가기 싫었어요. 가는 길에 열 번은 멈춰 섰어요. 단순히 게으름이나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어요. 몸이 과부하를 느끼면 실제로 움직임이 둔해지고, 숨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찾아오거든요.

 

근데 흥미로운 건,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작된 연기가 오히려 가장 좋은 결과를 냈다는 점이었어요. 긴장감이 극대화되는 순간 오히려 반응은 더 빨라지고 예민해지고 집중력도 올라갔어요. 그때 처음으로 긴장감이 단순히 부담이나 공포가 아니라 내가 움직이는 방식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어요.

 

 

Q.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연기’라는 분야가 어떻게 느껴졌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 무엇인가.

 

미술을 할 때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이 늘 어려웠어요. 완전히 빈 화면에서 시작해 스스로 모든 구조를 세워야 하는 방식이 저의 감각 체계와 잘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떤 자극을 기반으로 다른 형태의 유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자연스럽고 강하게 발휘되는 편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연기는 상대 배우가 주는 자극과 상황이 만들어내는 특수한 조건들이 모두 즉각적인 출발점이 되어주는 작업인 것 같아요. 이런 구조가 저랑 잘 맞는 것 같다고 느껴요. 연기는 자연스럽게 선택된 ‘나의 언어’ 같아요.

 

 

Q. 예술은 그동안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어떻게 달라져왔는가.

 

예술은 자신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에 가까운 것 같아요. 개인에게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세계를 인지하는 고유한 방향성이 존재하거든요. 미술은 그 방향성을 발견해 내는 과정이었고, 연기를 도전하며 결국 저의 진짜 방향성을 찾은 것 같아요. 예술을 오래 하면서 인간이 단일한 인격체가 아니라 여러 층위의 반응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했어요. 미술과 연기 모두 저에게 ‘일관된 자아’라는 환상을 해체시키는 작업이었어요.

 

예전과 달리 지금은 억지로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아요. 목표를 향해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요. 자극을 기반으로 창조하는 저의 방식이 잘 작동하려면, 스스로에게 적절한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나라는 사람을 해석하는 과정이 곧 예술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해요. 스스로 예술을 선택한 것이 어느 정도 정해진 운명 같아요.

 

 

Q. 앞으로 배우로서 어떤 방향성을 갖고 살고 싶은지, 목표나 바람을 말해준다면 무엇인가.

 

앞으로 나만의 장르와 세계관을 가진 배우로 살고 싶어요. 화려한 기술이나 외형적인 완성도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응 능력과 상태 전환의 안정성이라고 생각해요. 배우의 직업은 결국 외부 환경 속에서 자신의 내적 리듬을 유지할 수 있는 힘과 깊이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무대나 카메라 앞에서 환경이 바뀌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패턴을 갖고 싶어요. 그런 패턴이 있어야 자신이 가진 세계관을 더 넓고 깊게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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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녀는 자신의 불안, 긴장감, 변화의 과정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그 솔직함 덕분에 그녀의 선택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미술을 내려놓은 일도, 연기로 진로를 옮긴 일도, 단절이나 급작스러운 전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오래도록 지니고 있던 감각이 다른 방식으로 확장된 결과처럼 보였다.


그녀가 말한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다”는 문장에서 불안정함을 견디는 힘과, 자신을 성급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려는 태도가 함께 담겨 있었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다시 균형을 찾을지가 궁금해졌다. 이후의 시간이 그녀의 말대로 “균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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