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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장기 기증이라는 24시간의 공적 절차를 한 명의 배우가 여러 인물의 내적 독백으로 쪼개어 묘사하는 작품이다.

 

배우는 절차적 움직임 뒤에 숨겨진 17명 인물의 내밀한 독백을 시간 순으로 전개한다. 이처럼 사건보다 절차를 무대화하기 때문에 시간대별로 드러나는 인물들의 ‘내적 현상’에 집중한다.

 

시몽의 심장은 절망, 희망, 혹은 권태라는 각기 다른 무게를 지닌 17개의 인물의 관점과 부딫치며 끊임없이 재정의된다. 이 과정을 문학적이고 밀도 높은 독백들로 채워 관객을 각 인물들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소생실로 급박하게 달려온 간호사가 머릿속으로는 어젯밤 외면했던 연인과의 애증을 반추한다. 그녀에게 시몽의 죽음은 수행해야 할 업무의 일부일 뿐이지만, 연극은 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내면들을 지우지 않고 보여준다.

 

이처럼 연극에서 재현하는 ‘인간성’은 거창한 도덕이 아니다. 연극은 각자의 개별적인 세계가 타자의 비극을 어떻게 수신하고 번역하는가를 보여준다. 젊은 청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은 누군가에게는 '다시 되찾을 수 없는 목소리'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야근'이나 '애증 관계인 연인과의 연락'이라는 비정한 일상성과 충돌하는 것이다.

 

간호사의 사적인 번민이 시몽의 죽음과 나란히 배치될 때, 그건 인간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주의 무심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인간성은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인가? 아니면 의미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제스처인가?

 

작품이 열어놓는 잠정적인 결론의 방향은 뇌사 상태인 시몽에게 바닷소리를 들려주는 행위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의식은 사실상 죽었고, 그의 심장을 꺼낼 때 바닷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불필요한 절차다. 하지만 그것을 소독해서 끼워주고, 심장을 다시 봉합할 때 기도문을 읇고, 심장의 주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충동은 시몽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몽이 통과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수선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래서 가볍고도 무거운 시몽의 죽음은 인간의 무게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시몽이 시몽이라 부를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죽었다. 하지만 기능하는 생체 조직인 장기들은 그것이 인간의 부분으로 남아 여러 사람들의 삶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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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잘 쪼개지고 이음새 있는 이야기 구조도 주목할만하지만, 이 작품의 본질적 가치는 소설이라는 텍스트가 배우의 몸을 통해 연극적으로 '재매개'되는 방식에 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국립 정동 극장의 정밀하고 또렷한 조명기술-해상도가 높은 미디어아트, 배우를 중심으로 정확하게 조명을 조절하는 장치-과, 치밀한 연기-17개의 역할을 미세한 비언어, 언어적 표현을 변형하여 묘사하는-로 다시 만났을 때 이미 그 형식 자체가 촘촘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연극을 통해 재매개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유명한 소설을 원작을 연극으로 옮겨온 것이다. 하지만 책과 연극은 분명히 다르다.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종이 위의 검은 얼룩만을 대면한다. 그 얼룩 자체는 무생물이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거쳐 수많은 인물의 방백과 행동을 재현하는 통로가 된다. 독자는 책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연극 <살아있는 수선하기>에서 배우는 바로 그 '살아 움직이는 검은 얼룩' 그 자체가 된다. 소설이라는 텍스트가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만 박동한다면, 연극은 배우의 물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무대 위 배우의 가쁜 호흡, 땀방울, 오브제와의 물리적 충돌은 활자화된 인물들을 살아있는 육체로 번역해낸다.

 

책을 독자가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는 것처럼, 훈련된 배우가 재현한 연극을 관객은 배우를 하나의 세계로 바라본다. 연극에는 실존하는 육체가 그 과정을 짊어진다. 독자가 책에서 얼룩을 보고 세계를 상상하는 정적인 노동을 한다면, 연극은 배우가 그 상상을 관객의 눈앞에 강제로 밀어넣는 육체적 노동을 한다. 이 노동의 전이가 이 작품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뼈대 중 하나다.

 

한 명의 배우가 이 세계의 전부를 감당한다는 것은, 한 명의 배우가 하나의 세계를 일 수 있다는 놀라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세계를 지탱하는 한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작고 고독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행위다.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는 한 명의 배우가 17명을 감당하는 건 아름다운 것이기 이전에 고된 노동이기도 하다. 심장이 하나인 것처럼 배우도 하나다. 아마 그토록 그녀의 연기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녀의 기술이나, 이 연극의 예술적 디테일 이전에, 그녀가 여전히 박동하는 신체로 관객을 만나고, 책임을 지며 막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연극의 가치나 배우-내가 감상할 당시 김지현 배우-의 훌륭한 기술을 이야기할 때, 17명의 인물이 한 명의 배우를 통과한다는 것을 단순한 배우의 기술로 받아들이면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인극의 형식을 배우가 단단한 기반이 되어 받칠 때, 작품의 메시지가 비로소 완성된다. 이야기가 시몽의 심장이 수많은 타인의 관점에 의해 재해석되고 사람과 사람을 거쳐 영원히 박동한다고 이야기할 때, 형식은 한 배우가 모든 세계이면서 동시에 가장 작은 세계라고 답한다. 이 아이러니한 진실은 장기 기증이라는 삶의 파편을 완벽하게 은유한다.

 

그래서 내게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시몽처럼 끊임없이 박동하는 삶이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공명하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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