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숙주 Discarded Host》
이 전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순전히 전시의 이름 때문이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기 전 이름을 곱씹어 봤을 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수동성’이었다. 버려진 숙주와 의미상 큰 차이가 없을지라도, 버림 ‘받은’ 숙주는 버림이라는 주체 밖의 행위를 또 다른 수동적 행위인 ‘받음’과 결합한다. 즉, 숙주가 지닌 수동적인 면모가 더 부각된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작가는 ‘숙주’를 다양한 감각과 의식이 스쳐 지나고 충돌하는 장소로 설정했다. 자아가 머무는 곳이 아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버림받은’ 상태 역시 상실 혹은 붕괴보다 또 다른 존재 방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각 작품은 독립적인 장면인 동시에 서로 관계를 맺으며 내면의 흐름을 하나의 공간적 장면으로 펼쳐 보인다.
이 내용을 나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자면, ‘버림받은 숙주’는 자아가 존재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하는 공간과 같다. 다만 회화에 표현된 여러 형상이 심리적 장면으로 떠오를 때 발생하는 불안과 긴장, 분노는 자아의 가능성이 결코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향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괴물적 존재와 왜곡된 신체, 각종 충돌은 감각과 지각의 생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아의 변화를 의미한다.
나는 안내 책자의 설명을 고려하고도, 작품이 보여주는 자아의 가능성이 상실과 붕괴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느꼈다. 버림받은 상태가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암시한다고 하지만, 결국 ‘가능성’에 집중해 보면 무엇이든 붕괴할 가능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시를 관람하며 크게 체감한 부분은 고정되지 않은 채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숙주라는 공간의 상실감이었다. 다양한 감각과 의식이 스쳐 ‘지나가 버리고’, 충돌하여 ‘붕괴’가 일어나는 장소. 여기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형되며 언제든 이동하는 ‘자아’. 숙주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그릇이기도 하다.
버려진 중심 이후 무엇이 가능한가? 작가의 질문을 따라가며, 숙주와 그것이 품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시를 감상했다.
수동적 숙주의 세계
〈자화정물 Still-Portrait〉(2026)
자화정물이라는 용어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특징을 묘사한 ‘자화상’과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을 그리는 ‘정물화’를 합친 말이라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로 타자화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자아와 숙주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보이는 형상은 자아일까, 숙주일까. 자세히 보면 뒤쪽에 있는 거울 형태의 물체 속에 사람의 얼굴이 반사되어 있다. 그림의 중심이 되는 덩어리를 비춘 것이라면, 실제 모습과 비치는 모습이 사뭇 다른 것으로 보인다.
거울이 아니라 창문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외부의 누군가 창문을 통해 이 물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면, 물체와 정체 모를 관찰자 중 자아와 숙주는 각각 누구일까. 혹은 자아나 숙주 중 어느 하나만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조잡하게 여러 물체가 얽혀 있는 형상이 숙주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자아는 언제든지 숙주를 떠날 수 있으나 숙주는 그렇지 못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조각이 모여 숙주를 이룬 것은, 자아가 다양한 흔적을 활용하고 남겨둔 채 떠나버렸음을 의미한다.
작품의 이름이 ‘자화정물’이라면, 나 자신 역시 자아를 선택할 수 없는 숙주에 가까워 보인다. 인간에게 자아가 없다는 말이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인들이 자아 없이 살아간다고 자조하는 맥락과 닿아 있다. 나 자신을 투영한 그림이 정물에 속한다면, 나도 결국 껍데기에 불과한 사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벌초 Mowing〉(2026)
낫을 든 누군가가 벌초를 준비한다. 자세히 보면 벌초 대상인 풀들의 생김새가 심상치 않다. 사람의 얼굴로 추정되는 형상이 줄기 위로 솟아있다.
〈의식초 Conscious-Grass〉(2025)
앞선 그림에서 마주한 풀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다. 의식 있는 풀이라면, 왜 낫을 든 자가 이들을 베려고 하는 것일까.
전시 이름이 ‘버림받은 숙주’이기에 자연스럽게 자아와 숙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나는 숙주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바라본다. 그렇다면 그림 속에서 숙주는 의식초다. 그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는 낫을 든 자가 자아인 것일까, 아니면 그 역시 똑같은 숙주일까.
낫을 든 채 붉은 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은 벌초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낫을 쥐고 아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은 그가 이 행위를 내켜 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무엇보다 의식초와 표정이 닮아 있다는 점은, 그가 기꺼이 충돌을 감수하며 숙주를 떠날 주체가 아님을 보여준다.
숙주를 제거해야 하는 또 다른 숙주. 그는 어떤 자아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까.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체 없는 비극인 것인가.
〈발목 없는 자 The Ankleless〉(2025)
나의 감상은 발목이 물에 잠겨있을 뿐인데 왜 발목 없는 자라고 이름을 붙였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했다.
물에 발을 담근 채 먼 곳을 응시하는 존재. 얼굴을 볼 수 없어 인간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흘러가는 강물의 끝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허공을 응시하는 자 같기도 하다.
그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만으로 저렇게 넋을 놓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자아가 아님을 보여준다. 숙주는 너무나도 가볍고 흔한 존재다. 자아는 숙주를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쓰다 만 것들은 뭉쳐서 ‘자화정물’에 비친 형상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상실과 붕괴에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변형되는 유동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잃는다는 ‘상실’에 다시 집중해 본다. 숙주는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는 수동적 존재다. 수동적인 존재가 무언가를 잃는 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조종당하는 숙주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잃어야 하고, 설령 잃은 상태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믿어야 한다. 자신의 발목이 물속에 잠겨 멀쩡할지라도, ‘발목 없는 자’라고 명명된다면 그는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미열 Feverish〉(2025)
미열은 ‘그다지 높지 않은 몸의 열’을 의미한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미미해 보이지만, 작품 속 불꽃은 그리 작지 않다. 울창한 숲 사이, 연못 혹은 강물 위에 피어있는 미열. 크기가 이 정도임에도 미열로 여긴다면 물 근처에 있어 언제든 꺼질 가능성을 두고 이름 붙인 것인가 싶다.
〈열 Fever〉(2025)
‘미열’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반사되는 형상이 없어 불꽃 아래가 물인지 모호했던 미열과 달리, ‘열’은 아래 물결을 따라 반사되는 형상이 명확하여 불꽃이 물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그림을 봤을 때 나는 단순히 열을 미열 그 이상의 상태로 바라봤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열은 미열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열은 언제든지 꺼질 미열의 가능성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열보다 오히려 미열이 강해 보인다. 주변을 더 환히 밝히는 것은 미열이다. 주변이 온통 새까맣고 겨우 아래에 있는 강물만 비추는 열과 다르게, 미열은 주변 나무의 색까지 은근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미열을 포함하는 개념인 열이 이토록 힘없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다시 아래의 물에 집중했다. 미열과 열의 가장 큰 차이는 물에 자신의 형상이 비치는가다. 주변의 수풀은 중심이 아니다. 그저 물에 대한 반사만이 열과 연결될 뿐이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오히려 미열은 물에 비치지도 않으니 연결성이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주변을 더 환히 비췄던 미열은 자신의 열을 물에 비출 힘이 없었다. 그 열은 주변을 향해 비껴갈 뿐이다.
물은 열과 열이 반사되는 것을 결정하는 자아인가, 아니면 그저 열과 연결되어 자신이 반사를 결정할 수 없는 숙주인가. 물은 열이라는 숙주와 연결된 또 하나의 숙주일 뿐, 자신이 빛을 능동적으로 반사할 수 없다.
〈버림받은 숙주 Discarded Host〉(2026)
전시 이름과 동명인 작품이니 중요도가 높을 것이다. 거센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인간의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를 끌어안은 채 좌절감에 빠진 모습이다. 끌어안은 대상을 들여다보니, 자신과 똑같이 인간의 형상을 한 좀 더 작은 존재다. 큰 쪽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는 반면, 작은 쪽은 눈이 이글거리며 굳어진 표정을 보여준다.
작품의 이름이 버림받은 숙주라면 둘의 정체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둘 중 하나만을 숙주로 특정하려 했지만, 작품명이 ‘버림받은 숙주’라면 이 그림 속에는 숙주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둘 다 숙주인 것이다.
숙주들은 파도에 내몰려 있다. 마치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듯한 형상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특히 작은 쪽의 눈빛은 우리를 향하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을 버린 자아를 원망하고 있는 것일까.
숙주가 원망이라는 감정을 내세울 힘이 있을까 싶다. 이들은 그저 자아를 위한 장소일 뿐이다. 한낱 공간에 불과한 껍데기인 숙주가 자아를 원망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은 이들이 바라보는 대상 또한 자아가 아닐까. 이들은 또다시 주체 없는 원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주체 없는 원망의 대상
그림 속 숙주의 원망이 나를 향할 때, 그리고 그것이 자아를 향한 시선이 아님을 알았을 때, 나는 나 또한 자아가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조차도 자아가 될 수 없다면 이 전시장에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주체 없는 원망이 가득한 숙주만이 자리하고 있는 전시장에서, 나라는 인간 또한 껍데기를 확인하러 온 또 다른 껍질일 뿐이었다. 전시장 안과 밖, 그 어디에도 자아는 없다. 우리는 모두 버림받은 채, 서로가 숙주임을 무력하게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안타고니스트 Antagonist〉(2026)
이끼 낀 수풀 사이에서 엎드린 채 물에 비친 상을 응시하는 형상이다. 자신을 주체라 믿고 물에 비친 형상을 적대자라고 여기지만, 결국 타자화된 사물에 가까운 존재가 자신의 껍데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전시장 안에서 타인의 숙주 상태를 감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도 겹친다.
다시 작가의 질문에 집중해 본다. 버려진 중심 이후 무엇이 가능한가? 자신을 중심이라 믿었던 우리가 실상은 자아 없는 숙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버려진 이후 또 무엇을 도모할 수 있을까.
물에 비친 껍데기를 적대시하며 응시하는 것 외에, 자아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허락된 또 다른 존재 방식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