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세 번째로 도쿄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 나름대로 몇 가지 목표를 세웠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도쿄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보고 오겠다는 것. 얼추 유명한 관광지는 이미 몇 번씩이나 방문해 봤으니 해당 기간에만 구경할 수 있는, 혹은 국내에서는 관람하기 어려운 작품들을 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출처: 국립서양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도쿄의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대부분 '우에노 공원'에 몰려 있다. 그중에서도 국립서양미술관은 우에노역에서 공원 쪽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오른편에 금방 모습을 드러낸다.
미술관 앞뜰에서부터 다양한 조각상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본격적인 전시를 감상하기 전인데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오귀스트 로댕, <지옥의 문>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
조각상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들은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같은 로댕의 잘 알려진 작품들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동상들의 규모가 큼직해서 그 위세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눈에 익은 작품들이라 그런지 전시를 제대로 감상하기 전 머릿속을 환기할 수 있었다.
마치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 애피타이저로 입가심을 하는 것처럼.
요스 반 클레베, <세폭제단화: 십자가형>
카를로 돌치, <슬픔의 성모>
전시 초반부에서는 종교화, 혹은 성경의 내용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다수 감상할 수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미술 사조는 따로 있지만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세밀한 묘사와 화려한 색감 덕에 눈이 즐거워져 꽤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당시에는 파란 염료를 구하기 어려워 성모 마리아처럼 신성한 존재를 채색할 때 주로 사용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화가가 그림 한 장에 담고자 한 경이로움을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다.
에바리스토 바스케니스, <악기가 있는 정물>
이 작품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감상했던 작품 중 하나이다. 왼쪽 하단부에 있는 반구 형태는 '류트'라는 악기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기 위 쌓인 먼지와 그 위를 쓸고 지나간 손자국을 볼 수 있다.
이런 디테일에 감탄하며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서양인 아저씨가 옆에서 "It's so beautiful. Isn't it?"이라며 말을 걸어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자 아저씨는 자신도 저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며 소소한 자랑과 함께 그림에 대한 찬사를 이어 나가셨다.
원체 숫기가 없는 편이라 당시에는 간단한 호응 정도만 했었는데, 나중에 들어 생각해 보니 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갑작스러운 스몰토크에 당황했지만, 같은 감상을 공유하며 공명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했던 것 같다.
존 에버렛 밀레이, <늑대 굴>
국립서양미술관의 상설 전시가 만족스러웠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작품 해설 덕분이었다. 국립서양미술관 이전에 방문했던 도쿄의 타 전시에서는 영어 해설을 더듬더듬 해석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국립서양미술관은 거의 모든 작품에 한글 해설이 달려 있다. 단순히 일본어나 영어 해설을 번역해 둔 수준이 아니라 작품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적혀 있다.
덕분에 이 그림에 숨겨진 귀여운 에피소드와, '팬시 픽처'라는 개념을 알아갈 수 있어서 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조제프 베르네, <여름 저녁, 이탈리아의 풍경>
외젠 부댕, <트루빌의 해변>
개인적으로 풍경화 중에서는 하늘과 물을 동시에 담은 작품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늘과 물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면서도 빛에 따라 오묘하게 다른 색을 내는 것이 매력적이다. 국립서양미술관에도 이러한 작품들이 있었는데, 비슷한 풍경을 담아냈으나 화가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내는 두 작품이 인상 깊었다.
조제프 베르네의 작품은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하며, 해가 질 녘의 푸른빛과 붉은빛을 은은하게 담아냈다. 그 아래,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것 같은 호수는 묘한 청록빛을 띠고 있다.
외젠 부댕은 인상주의의 선구자답게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전반적인 풍경이 주는 분위기와 빛의 색감이 특징적이다. 청명한 하늘 아래 가득한 피서객들이 당시의 경쾌한 소음을 귓가에 들려주는 것만 같다. 베르네의 물빛이 투명했다면, 부댕의 물빛은 여름과 어울리는 시원한 청량감을 지니고 있다.
부댕의 작품을 보면서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해설을 읽어 보니 그의 작품이 모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클로드 모네, <햇빛 속의 포플러 나무>
클로드 모네, <보트 위에서>
내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술 사조는 바로 인상주의다. 카메라가 등장했던 시기, 화가들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돌파구를 발견한 사조의 탄생 배경 자체도, 작품마다 담긴 빛을 포착하는 화가들 각각의 시선도 마음에 와닿는다.
특히 모네가 그린 하늘과 물의 풍경은 늘 잔잔한 듯 생명력을 전해주어서 하루만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오귀스트 로댕, <입맞춤>
국립서양미술관은 그 앞뜰뿐만 아니라 전시장 내부에도 꽤 많은 조소 작품을 두고 있다. 그때 항상 눈에 띄어서 들여다보면 대부분 로댕의 작품이었다.
이런 조소 작품들을 실물로 감상할 때 좋은 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정면뿐 아니라 다른 부분들까지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입맞춤>이라는 작품을 최대한 많은 구도에서 감상하면서, 몰래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불순한 생각도 조금 했다.
오귀스트 로댕, <로즈 뵈레의 초상>
카미유 클로델, <페르세우스와 고르곤>
많은 사람이 '로댕' 하면 자연스레 떠올리는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 역시 전시되어 있었다. 카미유 작품의 실물도 굉장히 궁금했기에, 이 작은 조각상 하나를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는 로댕이 자신의 부인인 로즈를 모델로 하여 만든 조각상도 있는데, 같은 장소에 그의 불륜 상대인 카미유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게 나만의 웃음 포인트였다.
전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서양미술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상설 전시만 해도 유명한 작품들이 매우 많아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충분히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작품 해설을 통해 보이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미술관에서 나선 후에도 화가들의 목소리들을 더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