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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인간과 고기의 법칙 [영화]

양종현, <사람과 고기>(2025)

by 차승환 에디터
2026.09.1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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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있기 전에 현실이 있다. 영화는 먼저 현실을 습득한 후 그것을 묘사하거나, 왜곡하거나, 재구성한다. 영화에 있어서 ‘현실성’이 필수적 요소는 아니지만 필연적 기반 정도는 되는 셈. 보통의 많은 영화가 현실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지지만, 반대로 그 중 어떤 것은 영화의 힘을 빌려 현실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현실 속에서 하나의 현상을 자세히 포착해 묘사하는 영화,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의 관객에게 보통의 통증 정도는 유발하는 영화가 있다. 예컨대 지금도 75세 이상의 고령자 100명 중 54명이 빈곤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낯 뜨거운 현실 같은 것.


      양종현 감독의 영화 <사람과 고기>(2025)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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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리어카를 끌고 동네를 걷는 노인(들)이 있다. 인물을 굳이 복수형으로 지칭한 것은 이 영화가 우식(장용)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양종현의 영화는 길가에 버려진 폐지를 주워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 정확히는 간신히 생명만 이어가는 노인들의 삶을 노년의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정직하게 담고자 한다. 종이를 쌓아올려 몸보다 부피가 커진 리어카를 온몸으로 밀며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의 모습은 위태롭다. 몸이 가장 약해진 시간, 회복과 치유가 더뎌진 생애 마지막 단계에서조차 그들은 몸을 갈아내며 생명을 이어나간다.


      몸을 갈아 돈을 벌고, 그 돈을 이용해 갈린 몸을 채운다. 문제는 그렇게 번 돈만으로는 무너진 몸을 다시 채우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 종일 모은 폐지를 팔아서 받는 돈 “리어카 무게 빼고, 1,260원”으로는 당장의 허기도 제대로 달랠 수 없을 테지만, 쓰는 것과 버는 것의 등식조차 성립되지 않는 손실의 반복 속에서도 그들은 필사적이다. 종이박스 하나를 두고 서로를 ‘도둑놈’이라 비난하는 우식과 형준(박근형)의 몸싸움은 우습다기보다는 우울한데, 그것은 그토록 초라한 두 사람의 다툼이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이자 목숨을 내걸고 여생과 싸우는 전투이기 때문일 테다. 격렬한 싸움 후 거리에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이 멋쩍은 듯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은 사선을 함께 지나며 느끼는 일종의 전우애일지도 모른다.


      폐지를 둘러싼 다툼으로 인연이 된 세 노인 우식, 형준, 화진(예수정)은 형준의 집에 모여 함께 고깃국을 끓여 먹는다. 침묵 속에서 쇠고기뭇국이 끓기를 기다렸다가 귀한 진수성찬인 듯 허겁지겁 먹는 세 노인의 모습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잃고 마는데, 이는 우리가 외면했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의 한 단면―소박하고 평범한 고깃국 한 그릇 사먹기도 어려운 노년층의 빈곤―을 이 한 장면을 통해 아프도록 정확하게 묘파했기 때문일 것. 슬픔도 가여움도 억지로 더하는 일 없이, 그저 오랜만에 고깃국을 먹는 일 자체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간절했음을, 양종현의 영화는 너무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우식이 훔친 고기로 끓인 고깃국을 시작으로 세 사람은 ‘고기’를 먹기 위한 본격적인 소동을 벌이게 된다. 가슴을 졸이며 먹다가 도망친 첫 무전취식을 시작으로 세 사람의 행각은 점점 대담해진다. 뜯기고 갈렸던 그들의 몸과 삶은 ‘고기 먹기’라는 행위를 통해 활력을 채우기 시작한다. 반면 느릿한 뜀박질로 현장을 달아나는 세 노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끝내 무전취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빈곤층 노인들의 간절함에 대한 인간적 연민, 그리고 이와 같은 행위가 분명한 불법이라는 시민의 양심 사이에서 관객은 머물게 되는 것. 현실적 문제의식과 연민에서 출발했던 우리의 따뜻한 시선은 점차 무전취식을 즐거운 유희처럼 반복한 그들을 향해 “추태”라고 언명하는 판사의 언어처럼 차갑게 식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싸늘한 눈빛으로 묻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왜, 고기를 ‘반복해서’ 먹어야 했냐고.


      세 노인의 빈곤에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불법을 저지르며 고기를 먹는 행위의 당위성까지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세 노인이 반복해서 벌이는 행위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를 둘러싼 삶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인간은 고기에 가격을 매기고, 그 가격만큼을 지불한 이에게 고기를 허락한다. 이 간단하고 냉정한 교환법칙에 따르면 사람과 음식 사이에 있는 것은 자본이다. 돈이 있으면 마음껏 먹되, 돈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즉 오늘날 사람과 고기 사이에 성립되는 첫 번째 원칙은 이것이다. ‘돈이 곧 고기다.’


      두 번째 원칙은 형준에게 자신의 장례를 부탁한 학선(이춘식)의 임종으로부터 도출된다. 경제적 궁핍 속에서 스스로 아사(餓死)를 선택하는 노인 학선은 이렇게 말한다. 굶어서 죽는 건 돈이 안 든다고. 아프지도 않고 그냥 움직일 힘이 없어질 뿐이라고. 돈이 없으면 먹을 수 없고,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이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다. 그 굴레는 운명 같아서, 움직임의 근원―먹는 일을 먼저 끊어낸다면 인간은 오직 죽음을 향해서만 천천히 미동하게 되는 것. 생명력을 잃고 더는 움직이지 않는 육체를 우리는 고기라고 부른다. 아찔하도록 아픈 두 번째 원칙은 이렇게 드러난다. ‘인간이 곧 고기다.’


      돈이 곧 고기고, 죽어가는 인간의 몸이 곧 고기라면, 돈이 곧 인간이다. 이 간단하고 냉정한 원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을 가지지 못한 자는 인간일 수 없게 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하여 누구보다 예민했을 시인이었던 그가 죽음을 앞두고도 고기 먹는 행위를 유희처럼 즐겼던 것은 차가운 세상의 법칙에 불을 지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간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우식은 고기를 먹는다, 혹은 선언한다. 돈이 없어도 고기를 먹는 인간일 수 있다고. 고기가 고기를 먹을 수는 없으니, 인간이 살아서 고기를 먹는 일은 인간이 아직 인간의 존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이 유고작 같은 선언은 아직 많은 곳에 울리지 않았고, 지금도 살아있는 많은 노인이 고기를 먹지 못한 채 고기가 되어가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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