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개와 늑대의 영화 [영화]

제인 캠피온, <파워 오브 도그>(2021)
글 입력 2022.10.2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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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의 반려견을 함께 돌보게 됐다.

 

덩치가 작고 애교가 많은 어린 강아지였다. 낯선 사람도 곧잘 따랐고, 나에게도 몸을 부비며 꼬리를 자주 흔들었다. 공놀이를 하며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덜컥 겁이 났었는데, 내가 장난스레 지인을 건드리자 어린 강아지가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손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


그 순간 느낀 건 그 작은 생명체에게서 뿜어 나오던 공포감과, 내재된 본능과 야생성에 대한 경외감. 그 사나운 소리와 이빨의 형태, 그 후로도 한참동안 긴장을 머금었던 손가락의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그리고 새삼 다시 그날을 떠올리는 것은, 개의 이빨의 날카로움을 기억하게 할 좋은 영화를 만났기 때문이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파워 오브 도그>(2021)를 본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1925년 몬태나. 수많은 소떼가 일으키는 흙먼지 속에서 카우보이 복장의 한 남자가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집에 들어와 곧장 방으로 올라온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재빨리 “뚱보”를 찾는다.

 

여유롭게 목욕을 즐기고 있던 그의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는 필과의 대화가 어쩐지 탐탁지 않다. 복장부터 태도까지, 부모에게서 거대한 목장을 물려받은 후 25년을 함께 동업해온 두 형제의 거리는 짐짓 멀어 보이는데,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이 벌어진 거리 사이로 비극은 끼어들어 올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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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은 형제의 동업 25주년을 기념하지만, 조지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래됐네”라는 조지의 짧은 언급에 필은 “그렇게 오래도 아냐”라는 말로 대꾸하며 앞으로도 형제가 함께 할 미래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카우보이 복장의 형과 정장을 입은 동생. 복장만큼이나 다른 두 형제의 성향은, 일단은 야생과 문명의 간극이자 지향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차이처럼 보인다.


이러한 온도차에도 불구하고 필은 그들을 로마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대입한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형제처럼, 그들에게 목장 일을 가르쳐준 은인 ‘브롱코 헨리’를 기억하며 그들의 야생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러나 신화 속에서 로물루스는 동생을 살해하게 되므로, 레무스처럼 (인격적으로) 살해되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지향점으로 향하기 위해, 조지-레무스는 필-로물루스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할 테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저항의 방식으로 조지는 야생의 늑대(형제)가 아닌 가축화된 개의 삶(가정)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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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가 미망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와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을 전하자 필은 분노한다. 조지에게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던 필은 조지 스스로 ‘가축화’를 선택했음을 납득할 수 없다. 행복에 겨운 조지의 눈물(“혼자가 아니라는 게 너무 좋아서 그랬어.”)을 알 리 없는 필은 로즈가 재산을 노리고 조지를 유혹해 그에게서 동생을 빼앗아갔다고 여긴다. (“내가 왜 당신 아주버님이야? 꽃뱀 같으니.”)


환대 받지 못한 로즈는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필은 조지의 아내가 되어 자신의 집에 들어온 로즈를 냉대하며 괴롭힌다. 분노와 냉소에 차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는 필의 시선을 느끼며, 로즈는 극도의 공포감과 불안에 시달린다. 사냥감을 쫓는 늑대의 집요함 앞에서 그녀는, 자살한 그의 전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술에 의존하며 점차 망가지게 된다.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마침 방학을 맞은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가 목장에 머물게 되면서 필의 시선은 그에게로 쏠린다.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야생적 권위는 상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방식으로만 철저한 복수를 완성할 수 있을 것. 로즈의 정신을 무너뜨린 필은 이제 로즈의 아들마저 그녀에게서 빼앗아갈 테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문화적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는 야생의 법칙대로, 필은 성경 이전의 복수 방식에 착수한다.


필은 피터를 본인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물들여 로즈를 절망케 하려는 의도로(비록 이 의도는 가일층 복잡하게 변해갈 테지만) 피터에게 접근한다. 자신의 영역을 순수하게 침범하는 피터에 대한 거친 분노를 삼키고 승마 기술과 밧줄 꼬기 등 카우보이의 삶을 가르치면서, 어쩐지 필은 점차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필의 섹슈얼리티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몇 장면을 지나며 감정은 더욱 농밀해진다.


영화 중반부부터 이어지는 필의 감정선 변화를 따라가다가도, 우리는 문득 서늘함이 느껴지는 장면에 머물게 된다. 종이로 꽃을 만들거나 앨범을 꾸밀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로 우선 등장하는 피터는 마초적인 필과 대조적으로 비춰지며 먹잇감의 운명을 맞이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언뜻 보여주는 피터의 다른 모습이 새로운 결말을 암시하는데, 사실 피터는 가축화 된 순한 개가 아니라 치명적인 송곳니를 숨긴 맹견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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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이 풍부한 피터가 그의 한 면이었다면, 당연한 듯 닭을 잡거나 토끼를 해부하는 냉철한 피터는 그의 다른 한 면이다.

 

피터는 엄마 로즈를 지키기는 일을 존재의 목적으로 여겼고(“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엄마를 구할 수밖에.”), 필은 로즈를 몰락시킴으로서 피터의 감수성을 완전히 앗아갔다(영화 초반부 필이 피터가 만든 종이꽃을 불태우는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필이 피터의 한 부분을 죽였으므로, 이제 남겨진 피터의 다른 한 부분이 필을 죽일 것이다.


필에게는 ‘브롱코 헨리’라는 부성의 부재가 사무쳤지만 피터에게는 부성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브롱코만이 볼 수 있었던 언덕의 개 형상을 찾아낸 피터를 야성적 혈통으로 인정하게 된 필은, 그에게 가업을 승계하고 조언하는 아버지-존재가 되어간다. 필은 피터에게 점차 섹슈얼한 아버지-존재가 되어갔으나, 피터에게는 필에 대한 냉정한 복수심만이 불타오를 뿐이다. 비극은 감정의 거리 사이에서 마침내 방점을 찍는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시편 22:20)
 


늑대가 죽은 자리 위에서 마침내 개들의 평화가 피어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창문 너머로 조지와 로즈의 포옹을 지켜보는 피터의 서늘한 미소를 보면서, 우리는 이 영화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악이 될 수밖에 없던 개의 세력에 대한 이야기, 혹은 유일한 것을 뺏어간 개의 세력에게서 끝끝내 구해지지 못한 외로운 늑대의 이야기,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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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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