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랑의 다른 이름, 너를 위한 글자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며, 꿈을 응원하고 그를 아껴주는 것
글 입력 2024.02.0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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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랑



‘살려고’라는 말과 ‘죽지 않으려고’라는 말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우리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거야, 죽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거야? 사랑하기에 살아 있는 거야, 사랑하려고 사는 거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을 오래 곱씹었다. 결국엔 이 모든 건 결국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게 하는 거야.


지금은 사랑하는 것들이 품에 가득 다 안기 힘들 만큼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나는 공연예술을 너무 사랑하고 아껴서 그것을 안고 뺨을 비비고 잘게 입맞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땐 밥때도 잊고 공연을 보러 갔다. 캄캄하게 내려앉은 어둠으로 나를 지운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를 괴롭게 만들던 지난한 일상은 잊혔다. 나를 떠나 다른 이야기 속에 코를 묻고 나면, 나는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삶은 프리다이빙 같은 면이 있다. 산소통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맨몸으로 잠수하는 그런 다이빙. 오로지 내 능력만큼만 바닷속을 유영할 수 있다. 더 깊이 잠수하고, 너른 바다를 탐닉하려면 훈련하고, 훈련해야 한다.


인어공주처럼 마녀에게 부탁해 단번에 내 호흡 방식을 바꿀 수는 없었다. 바다에 잠수한 채로 살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삶이라는 바다에 잠수하기 위해, 아가미를 다는 게 아니라 숨을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웠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딛고 밀어내며 비로소 삶의 아름다운 구석을 발견했다. 사랑이 그리하게 했다. 사랑이 다시 숨을 끝까지 내뱉고, 눈을 뜨게 했고 귀의 먹먹함을 견디게 했다.


삶으로 잠수할수록, 공연과는 멀어졌던 것 같다. 공연이 비로소 삶이라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알게 했지만, 동시에 삶에 뛰어들고 보니 숨을 참고 견디는 일이 벅차 더는 바다를 본뜬 공연으로 다가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익숙한 권태감이 밀려들었고, 나는 주저앉았다. 내가 가진 유일한 사랑을 잃었다는 생각에 지난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허탈했다.


오랜만에 찾은 공연장은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약간의 무료함이 들기도 했다. 기대감보다는 어제의 잠수로 인한 피로감에 살짝 감긴 눈으로 나는 포스터를 한참 바라보았다.


흐릿하게 그려진 설계도 위 타자기. 향긋한 들꽃과 고글, 수첩과 설계도.


너를 위한 글자.

 

 

너를위한글자_포스터.jpg

 


 

시놉시스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 ‘마나롤라’


그곳에는 이상한 발명품만 만드는 투리가 살고 있다.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인 그의 생활에 갑자기 끼어든 작가 지망생 캐롤리나와 유명작가 도미니코. 시간이 지나면서 투리는 두 사람이 ‘소설’이라는 공통 사로 자주 만나는 것이 신경 쓰인다.


캐롤리나를 통해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투리는 그녀가 계속 꿈을 꿀 수 있도록 그녀만을 위한 발명품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사랑의 다른 이름



<너를 위한 글자>는 흔히 다들 매료되는 운명이라든가, 극적인 사랑, 높은 곳까지 올라섰다가 단숨에 고꾸라지는 그런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배신도 살인도 일어나지 않고 그 어떤 격렬한 노여움과도 맞지 않았다. 화창한 날 잠잠한 바다 같은 극.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이런 잔잔함이 매력적으로 와닿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극은 바로 그 잔잔함, 재잘거리는 말소리를 닮은 그 분위기에 의미가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의 행복과 꿈을 위해 서로 손 잡는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의 선한 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통해 이 극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준다.

 

사랑은 어쩌면,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일지도 몰라.


사랑은 아껴주는 거야.


캐롤리나와 투리, 도미니코는 꼭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사랑이 변할까 무서웠다. 공연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변하면 어떻게 될지 두려웠다. 더는 내가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 그를 아껴주는 거라고 말하듯이, 설령 마음이 변한다 해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랑한 시간이 의미 없지 않다고 노래한다.

 

어린 시절 고향을 찾고, 그곳에 계속 머무르는 이들은 멈춰있거나 정체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했던 시간을 간직할 줄 알고, 추억이 아름다운 줄 아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시작된 곳을 되돌아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아는 선한 이들.


이제야 나는 무대가 보였다. 투리와 도미니코가 시력을 잃어 꿈을 포기하는 캐롤리나를 위해 만들었던 그 타자기가, 바로 무대였다. 그들이 밟아가며 사랑과 추억을 노래하던 그 무대가 바로 ‘너를 위한 글자’ 그 자체였다.

 

캐롤리나가 투리와 도미니코를 이끌어주었듯, 투리와 도미니코는 캐롤리나에게 '너를 위한 글자'를 선물한다. 그처럼 이 무대 역시도 그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타자기 모양의 무대를 보여주며, '너를 위한 글자', 사랑은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너를 위한 글자'는 무엇일까.


너를 위해, 너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 너를 온 힘을 다해 아껴주기.


그것은 무엇일까.


눈물로 젖은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조금은 나를 더 아껴주고 사랑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내가 끌어안게 된 마음과는 어쩌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그러니까 '나'를 좀 더 위해서 글자를 쓰고 써나간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고, 그게 나에겐 '너를 위한 글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너'를 위해 나는 써보려고 한다. 너를 위한 글자를. 글쓰기야말로 내가 나를 아끼는 방법이며,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고, 내 꿈이니까.

 

 

[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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